오늘날 교회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과연 교회가 건강한가”에 대한 질문은 다분히 생물적인 접근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각 개인에 대한 “당신은 건강하십니까”에 대한 질문이 교인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교회로 옮겨 오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회가 건강한가”하는 물음은 ‘몸이 건강한가’ 혹은 ‘육체적 진단(생물학적인 진단)으로 볼 때 균형을 갖추고 있는가’하는 질문으로 교회를 진단하는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로 교회를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이해하려고 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신학자 카이퍼(Abraham Kuyper, 1823-1920))였다. 그는 칼빈주의 신학자로서 신학에 최초로 19세기 한 참 유행하던 생물학적인 용어인 오르게닉(Organic)이라는 용어를 교회와 기독교 자체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그가 쓰고 있는 이 용어의 의미는 우선 사람의 몸이나 신자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의 정체성(Identity)을 잘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신학은 영혼과 육체 혹은 영, 혼, 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몸이 어떻게 연합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역시 신학은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해야하는지도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한 용어가 곧 생물학적인 용어였던 오르게닉(Organic)이란 표현이었다.

결론적으로 ‘오르게닉’이라는 생물학적인 용어가 신학 용어로 채택되었을 때에는 본래의 의미를 초월한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단지 육체와 혼, 혹은 영, 혼, 육이 잘 조화롭게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뜻만이 아닌, 이런 조화가 교회라는 공동체에 사용될 때에는, 1) 교회가 하나님과 그리고 이웃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느냐하는 질문(건강한 교회란 무엇인가)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2) 소위 교회를 한 몸으로 생각하고 마치 육체와 영혼, 혹은 영, 혼, 육이 서로 이상적으로 결합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The Body of Christ)으로서의 교회의 이상적인 성격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귀착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르게닉’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 단지 생물학적인 표현에 머물지 않고, 기독교 신앙 체계를 설명하는 총체적인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된다면, 건강한 교회라는 의미로 표현되는 ‘오르게닉’한 교회는 분명 문자적인 표현(생물학적인 의미) 그 이상의 의미를 소지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교회가 진정 문자적인 의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교회일까’에 대한 답을 마지막 부분에 시도하고자 한다.

건강한 교회는 좋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를 말한다. 유명한 가톨릭신학자 한스 폰 발트자르(Hans von Baltzar)나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개신교 신학자 알브레히트 페터스(Albrecht Peters)교수는 기독교인이라면 가져야 할 네 가지의 규범을 제시해 준다. 그것들을 교회에 적용해보면, 건강한 교회는 다음의 4가지 규범(coram Deo, coram hominibus, coram Meipso, Coram Mundo)을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즉,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神前意識(신전의식)이 우선 있어야 한다. 모든 의사결정에는 반드시 먼저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태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무엇이 하나님의 듯인지를 식별하는 문제는 항상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오늘날 사회 정치적 가치에 편승하여 다수의 의견이 곧 진리라고 하는 불합리한 공식이 교회 안에서는 철폐되어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제한된 공동체의 규칙으로 한계지우는 일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어떤 교단들의 총회장 선출방식이 제비를 뽑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다. 이런 것은 성경의 방식을 따르는 것 같지만 성경 속의 사람들의 방식을 모방한 일에 불과 함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교회란 이웃(coram hominibus)과의 건강한 관계정립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한 때 한국교회는 교회가 ‘개인구원이 먼저냐, 사회구원이 먼저이냐’ 하는 낡은 논쟁 아래 오랫동안 갇혀 있었다. 초대교회에서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개인구원과 이웃을 위한 구제라는 개념으로 포괄적으로 사용해 왔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교회는 결국 사회와 동떨어진 고립된 섬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교회는 사회 속에 연관되어 있고, 또한 그 역할도 이전의 개인 구원의 역할로부터 교회의 사회적 역할로 확대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즈음해서 우리의 관심사는 적벌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일 것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은 곧 교회의 자기 정체성을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현대 정치사를 들여다보면, 한 때 복음주의 보수주의 입장을 지닌 교회들이 정교분리라는 전통적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정치적 독재정권이 만연하도록 기회를 준 적이 있었는가하면, 이에 반하여 소위 소외 엘리트의 역할을 하던 반정권적 혁명의식을 가졌던 교회들이 오히려 지난 정권들의 비호아래 지배엘리트로 변화함으로서 교회의 복음적 자기 정체성을 넘어 정치적 사회 집단화하는 잘못을 범한 적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란 자기 성숙(coram Meipso)이 전제되어 있는 교회를 말한다. 소위 '자신 안의 내면적인 갈등과 성적인 충동'(coram Meipso)으로부터 벗어나 성숙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는 말이다. 교회는 구원을 소지하고 있으면서도 많은 갈등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기, 질투, 분당, 권력욕, 당회원 사이의 갈등, 돈 문제 등 많은 교회 안 밖의 갈등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개인의 문제라고 해도 교회 안에서는 곧 교회 전체 문제로 진화된다. 때문에 교회는 자기성숙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우리 이민 사회의 교회들은 세속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시킴으로서 교회를 단지 사회적인 단체 중 하나로 스스로 간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교회는 적어도 자기 성숙을 위한 변화가 있어야 하고 이웃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자신의 본 모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교회는 자연친화적인 교회(coram Mundo)이어야 한다. 종래 교회가 이 용어인 ‘코람 문도’(coram Mundo)를 사용할 적에는, 자연을 숭배하지 말고, 자연을 잘 다스리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좀 더 현실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자연친화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즉, 과거의 본래적 의미에 현재의 의미를 첨가한 해석이 요망된다.

종래적인 의미로 ‘코람 문도’는 세속적인 물질화를 넘어서야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오늘날 교회의 물량주의와 배금주의는 교회 건축에서부터 공익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일반적인 교인의 사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정직하고 검소해야 한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생활의 자원들을 검소하게 활용하고 아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