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은 로마 가톨릭의 새로운 선교 부흥을 이루는 전기가 되었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30년간 이어진 종교전쟁으로 가톨릭은 유럽에서 치명타를 입었다.

신대륙 발견과 선교는 유럽에서 잃은 교회와 신도보다 몇 배 더 많은 교회와 신도들을 얻게 됨으로써 가톨릭 선교의 황금시기를 300년 동안 누리게 한다.

신대륙에서 선교 황금기를 이룬 세 가지 요인이 흥미롭다.

첫째는, 교회관이 선교에 유리했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 ‘우주적 교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교회관에서는 신대륙과 그곳 사람들이 발견되었을 때 당연히 그곳도 가톨릭교회의 교구가 되어야 된다는 개념이 있었다. 발 빠르게 사제들을 보내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둘째는, 수도원 제도였다.
수도원이 주요 선교사 자원의 풍성한 공급처가 되었다. 수도사들은 여러 면에서 적극적 선교 참여에 유리한 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청빈, 순결, 순종의 서약을 해야 했다.

청빈(淸貧) 서약은 자신의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겠다는 서약이다. 소유재산이 없으므로 파송 명령이 하달되면, 자신이 입던 옷 몇 가지와 담요 한 장을 꾸려서 언제든지 새로운 지역으로 즉각 투입될 수 있었던 것이다.

순결(純潔) 서약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모험적인 헌신을 고려할 때 가장 걸리는 것은 가족들이다. 부양가족이 없으므로 홀홀 단신 하나님의 부름에 과감한 응답을 할 수 있었다.

순종(順從) 서약은 주님께, 로마 교회의 교권에 순명하므로 따르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이그나티오스 로욜라(Ignitions Loyola)에 의해 설립된 제수이트(Jesuit, 예수회)는 군대 같은 조직과 명령계통을 가지고 있어서 파송이 신속하게 이뤄졌다.

셋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신대륙 발견이었다.
이들은 당시 로마 교황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두 기둥이었다. 15세기 중엽에 해상세력을 장악하면서 사라센 세력권 밖까지 탐험을 하게 되었다. 탐험선에는 항상 사제나 수도사가 승선했고 신대륙 발견 즉시 교황청에 보고한 후 선교사역의 포문을 열었다.

가톨릭의 신대륙 선교는 세속 정치세력과 결합된 선교정책을 만들어냈다. 교황의 권위가 세속 권력보다 위에 있다는 개념 때문에 세상 모든 땅과 신대륙의 점유권도 당연시하였다.

교황 니콜라스 5세는 1454년에 아프리카에 대한 독점 점유권을 포르투갈에 허락해 주었다.
교황 갈릭투스 3세는 포르투갈이 미래에 발견하게 될 새로운 신대륙 점유권까지도 허락해 주었다.
스페인과 각축을 벌이자, 분쟁을 막기 위해 교황 알렉산더 6세는 1493년 칙령을 내린다.

대서양의 아조레스 섬을 중심으로 북극에서 남극까지 선을 그어, 서쪽은 스페인 왕에게, 동쪽은 포르투갈 왕에게 독점권을 허락하였다. 이듬해 다시 서쪽으로 370해리 이동시킨 결과, 포르투갈인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1500년에 브라질을 발견하였고, 포르투갈령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독점 점유한 신대륙에 반드시 국왕의 경비로 교회를 세우고 사제를 임명하여 선교 활성화 시켜야 한다는 책임 서약이 빠드로나또(patronato) 제도다.

이를 통해 가톨릭교회는 신대륙 발견의 속도와 비례하여 신속한 선교를 이뤘지만,
후에 교회의 타락 및 정치세력화를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었을뿐만아니라,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다.

영적인 차원의 순수한 사명을 잃고
정치수단의 한 방법으로 전락,
피상적인 선교,
명목상 크리스천 양산,
기독교가 식민통치 국가의 등에 업혀 쉽게 선교를 이루지만 결과는 피상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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