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수재들이 다니는 대학 중의 하나인 카이스트에서 4명의 학생이 자살을 하고 세계적인 학자로 명성을 떨치던 교수가 자살을 했습니다. 불행을 당한 부모와 가족들에게 큰 슬픔과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된 것처럼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과도한 개혁 추진과 경쟁 상황, 징벌적 등록금 부담 등 다양한 의견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교수들은 비상 대책 회의를 열고 과격한 제안을 하고 있고 학생들은 차기 총장 선거에 학생들도 투표권을 달라는 등 투쟁에 가까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수재들의 교육은 천재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수재들의 능력, 가능성, 그들의 심리상태, 그들이 고민하는 문제 등 수재들이 처한 문제들은 범재와 둔재가 알지 못합니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전교 일등을 놓쳐 본 적이 없는 학생들이 대학의 전공 분야에서 사오십등을 하는 충격을 받고 수년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 지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들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친구들도 모릅니다. 부모와 가족들, 고등학교 동창들도 알 길이 없습니다. 한국사회가 시급하게 터득해야 할 숙제는 수재를 이끌고 키워 줄 천재들을 모으고 수재들을 키울 환경과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온 나라를 떠들썩 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어린 수재와 천재들을 나타나도 종종 범재들이 그들의 교육을 맡는 것을 봅니다. 그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한계까지 밀어 줄 사람들은 그들이 가는 길을 먼저 갔던 수재와 천재들입니다. 카이스트의 문제는 국회의원이나 대학 구성원들이 나서서 해결방안을 제공하기보다는 오히려 비슷한 문제를 많이 경험한 세계적인 학교들의 지도자들이나 비슷한 경험을 거친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건강한 사회는 둔재와 범재와 수재와 천재가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일을 하고 똑같은 행복을 누리는 사회가 아닙니다. 각자의 능력에 맡는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각자의 능력에 어울리는 보상을 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다만 행복의 양은 둔재와 천재에게 동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은 개인의 능력에 비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이스트의 개혁 드라이브 때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수재들은 원래 개혁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쟁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지난 20년간 한국 사회를 광적으로 몰고 가던 경쟁이라는 소용돌이의 한 복판에서 승리한 학생들입니다. 등록금이 문제라고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많은 사교육의 혜택을 본 학생들이고 카이스트 학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회에서 특혜를 받을 수 있는 학생들입니다.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배운 행복을 구하는 길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회는 결과보다 과정에서 행복을 찾는 법을 가르치는 사회입니다. 초등학교 운동 선수가 일등을 못하면 일등을 빼앗겼다고 말하고 공개된 자리에서 노골적인 분노를 터트리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 냅니다. 국제 무대에 선 최고 정상급 운동선수들이 일등을 못하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 가장 분한 표정, 가장 허탈한 표정,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일이 흔합니다. 결과는 결과일 뿐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고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면 수재나 범재나 둔재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불행할 뿐입니다.

성경은 결과에 비례하는 행복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결과는 주님의 소관입니다. 내가 한 일의 결과가 위대한 하나님 나라에서 어떻게 쓰임 받을 지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주님께 쓰임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인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에까지 행복은 결과에 비례한다는 착각에 스며 들어와 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는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행복을 찾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