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예언서라고 하는 주장은 모든 기독교회가 중요한 진리로 받아들여 왔다. 특별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였던, 카톨릭의 교황주의와 예전중심주의에 대항하여 싸워야만 했던 종교개혁 당시와 성서비평론이 대두되고 있었던 지난 세기의 초두에는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온 말씀을 기록한 책임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카톨릭의 외경과 가경이 성경의 유일성을 훼손할 때마다 성경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자율성과 최고의 진리의 책임을 강조해야만 했다. 때문에 정통 개혁교회는 성경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예언 그 자체이며 그 어떤 예언도 하나님이 성경이외에 언급하신 일이 없음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로서 모든 예언의 은사적 기능은 성경 안으로 축소되었고 그 가능성의 여지는 교회사에서 거부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예언은 구약으로부터 신약에 이르는 과정 동안 미래에 대한 언급과 또한 하나님의 미래적 이상을 본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예언의 기능은 형식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 이스라엘에게 잠정적으로 끊어졌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예수중심의 사도들의 교회 안에 이 예언의 기능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소위 예언은 사도들에 의해 혹은 성서 저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구원을 위한 지혜를 전달하는예언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부속적으로 은사중심의 예언이 카리스마적 기능과 또한 영을 따라서 예언의 형식으로 교회들에게 주어지기도 했다. 아가보와 빌립의 딸들의 예언은 그 실례가 된다. 고린도 전서 14장의 초두에 나타나고 있는 바울의 교회에 대한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천거는 성경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나 실제적으로는 예언이 단지 어떤 특정인, 즉 성서저술가들에게만 주어진 은사의 기능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안에서 행하여 질 수 있는 기능이기도 함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예언의 기능은 사도 이후의 교회에 남아 95년경 클레멘트의 글과 100년경의 디다케(Didache), 140년경의 헤르마스의 목자(Shephard of Hermas)글 등에 잘 나타나고 있는 바와도 같이 일상적인 교회의 은사로 남아 있었다.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과 그의 제자였던 익나티우스의 글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으로 교회에 예언을 했다는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예언서임을 강조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나타나게 된 몇 가지 부정적인 요인들 때문이었다. 즉, 우선 초대교회 역사 초기에 나타나고 있었던 말시온주의와 발렌티누스주의는 성서의 유일성을 훼손하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유일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소위 그들은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 나머지 아직 초대교회에 나타나고 있었던 예언적 기능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의 강조점은 성경의 유일성을 거부하려 했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믿었던 대로 성경의 지평을 연장한다는 점에서 예언을 덧 붙여 언급하거나 해설하려하는데 있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의도와는 달리 성경의 유일성을 거부하거나 완결 혹은 완전성을 거부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카톨릭에 대항했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구원적 기능을 강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교황지상주의에 대항할 만한 스로건을 찾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 때 그들이 선택한 것은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으로 였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성경으로라는 강조를 택한 것은 예전중심의 카톨릭과 개인의 예언적 은사의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재세례파와 및 민간신앙의 폐해에 대한 정통신학의 확립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신교회는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신비주의적 경향과 반성경주의적인 카톨릭으로부터 개신교회를 수호하려는 방편으로 성경의 유일성을 강조한 나머지 아직 교회에 나타나고 있었던 은사적 기능으로서의 예언적 기능의 가능성을 모두 말살해버리는 과오를 낳았다. 많은 재세래파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독일 남부의 슈바븐지역의 수많은 형제교회들이 이단으로 정죄되어 죽임을 당했다. 독일 북부 뮌스터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왕국을 세워 천년왕국 재림을 예언하고 있었던 일단의 재세례파들이 교회에 의해 몰살당함은 그 단적인 예였다. 분명히 이 역사적 사건들은 왜곡된 예언적 기능이 낳은 폐해의 결과였으나 그러나 정통교회가 선택한 길은 모든 예언적 기능을 부정적인 역사적 실례로 인해 모두 거부해버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은사로서의 예언적 기능이 또 한번 거부된 것은 지난 세기의 초두였다. 당시 미국의 정통 개신 교회들은 두 가지의 도전을 직면하고 있었다. 바깥으로는 유럽에서 발생하고 있던 고등비평과 성서비평학이 정통교회의 성경의 사건들을 신화 혹은 역사적 증거가 없는 이야기책으로 간주함으로써 성경의 무오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 안으로부터 나타난 도전은 새롭게 등장한 오순절운동의 결과였다. 새롭게 부상한 오순절운동은 정통교회의 성경관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사실은 오해로 빚어진 일이었지만, 새로운 계시를 받아 예언을 한다는 것은 성경의 유일성을 훼손하는 일일 뿐 아니라 성경의 완전성과 완결성을 거부하는 결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에언의 은사적 기능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거부된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적 기능이 더욱 전적으로 거부된 것은 워필드(B.B. Warfield)의 “성경의 영감론”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의 신학계를 주도하고 있었던 프린스톤신학의 거두였던 그가 주장한 것은 모든 예언적 기능이 사도시대로 끝이 났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오순절운동과 함께 나타나고 있던 예언적 은사기능은 심각한 이단적 기능이 된 것이다. 그가 그런 주장을 폈던 것은 어거스틴 이래의 전통적인 교회의 주장을 반복한 것이지만 자신의 시대의 급박한 상황에 따른 결과였으며 또한 자신의 신학적 결단 때문이기도 했다. 즉, 워필드는 오순절의 성경해석이 성경의 유일성과 완전성 내지 완결성을 훼손할 것으로 느꼈으며 또한 모든 시대마다 하나님의 역사의 성격은 각기 다르다라고 하는 자신의 세대주의적인 발상에 반하는 사상을 오순절로부터 발견했던 것이다. 때문에 예언의 은사적 기능을 아직까지도 주장하고 있던 오순절신앙은 그에게는 이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세대주의적 발상이야말로 “성령은 매 시대마다 독특한 역사와 동시에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역사 하신다”는 점을 거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개혁교회들은 대체로 워필드의 신학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교회의 1/3을 차지하는 오순절운동의 약진과 교파를 초월한 카리스마운동의 영향으로 이러한 주장들은 퇴색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첫째로 우리는 성경이 유일한 하나님의 예언의 책이며 또한 구원의 완전성과 완결성을 지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어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히 사도시대에는 아직 성경이 완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글들과 교회에 전해지고 있던 성경의 일부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임이 사도들에 의해 강조되고 있었다. 오늘날 우리 손에 쥐어진 성경이 90년경까지 얌니아회의에 의해 결정될 때까지만 해도 성경은 완결되지 않았었다. 성경이 66권으로 완결될 때까지 그 동안 교회를 향한 수많은 예언들이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그 속에는 진정한 예언적 기능, 즉 구원에 대한 지혜를 가르치는 성경저술로 연결된 예언의 기능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시대마다의 상황적 예언들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게 주어진 수많은 예언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구원의 유일한 책이자 또한 유일한 완결된 예언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그 어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가져다주는 예언적 기능도 성경 이외의 자료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이자 곧 정통 개신교 교회들의 신앙인 것이다.

둘째로 예언의 기능은 구원을 위한 지혜의 전달이라는 기능과 하나님의 교회와 각 개인들의 삶에 관여라는 점에서 은사적 기능으로 나타남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혹자들은 그 은사적 기능이 더 이상 역사적 기록 가운데 발견되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수많은 초대교회의 문헌들 속에서 예언의 기능들이 교회 안에 행해지고 있었음이 오늘날 밝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예언적 기능은 오늘날 교회에서도 행해질 수 있으며 행해져야만 한다는 적극적인 가능성을 초대교회로부터 발견하게 된 다는 점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언급컨데, 역사적인 비극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교회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교회와 각 개인들에게 주어지는 예언적 기능이 예언자의 인격과 지식한계 혹은 곡해등으로 수많은 역사적 폐해를 낳았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은사적 기능으로서의 예언행위에는 일정한 검정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예언은 그리스도교회를 세우는데 분명한 목적과 방향성을 소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진로를 탈선할 때 나타나게되는 결과는 오히려 모든 예언적 기능을 성경 안으로 축소하고 모든 예언은 성경으로 완결되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것이 더 타당하고 유익된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예언의 기능들은 반드시 교회와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단서를 결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