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울음입니다.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힘찬 울음소리와 함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두 번째로 배우는 것이 웃음입니다. 아무리 천진난만한 아이라 할지라도 “우르르 까꿍”하고 제스처를 취하면 아이는 천사의 미소를 띱니다. 아기의 미소는 부모는 물론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배우는 것이 말입니다. 말을 배우기 이전의 아기는 모든 의사소통을 울음으로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엄마는 자기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그 아이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금방 알아냅니다. 그러므로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소중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유교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우는 것을 절제시켰습니다.

특히 남자들이 눈물짓는 것은 사내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얼마나 강조를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자아이가 울면 “남자가 창피하게 울고 그래!” 그러면서 어른들이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생리학적으로 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울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리적으로 남자는 여자보다 눈물 분비샘이 더 크기 때문에 눈물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지나치게 억제하면 슬픔과 한이 쌓여서 몸을 해치는 독소가 됩니다. 암 전문의인 이 병욱 박사가 쓴 “울어야 삽니다.” 는 책에서 “가장 정직하게 눈물을 흘리는 시간은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토해 내듯이 우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는 가슴 속에 맺힌 분노와 화, 미움과 슬픔과 한을 눈물에 담아 펑펑 쏟아내야 몸 안의 독소를 뽑아내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가슴이 메마르고, 우리의 눈에 눈물이 메말랐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의 이란 모습들을 뒤돌아보아야하겠습니다. 혹시 내가 주님 앞에서 나 위하여 고통당하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 기억이 언제인지를 말입니다. 또한 나의 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 앞에서 나의 더러운 죄를 바라보며 참회의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 앞에서 기쁨으로 찬양하며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인지를 가슴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내 눈에 눈물이 말랐다는 것이나, 내 가슴에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 내 영성의 샘이 메말랐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며, 삭막한 인생, 주님과 멀리 떨어진 인생을 살았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눈물이 메마른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눅7:32)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슬픈 드라마를 보면서는 눈물을 흐리면서도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난을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을 위해서는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함께 울어주지 않는 메마르고, 강퍅한 세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무엇일까요? 바로 눈물입니다. 그 눈물은 바로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삶,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