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이 그처럼 여러 번 증거했던 예수님이 출현 했지만 예수님의 거동은 도무지 미온적이었다. “저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나는 쇠하여야 하고 저 분은 흥해야 한다”고, “나는 저 분의 신발의 끈을 풀기에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러 번 기대와 염원을 집약하여 증거했건만 예수는 예상했던 대혁명을 일으키지도 않고, 상경하지도 못하고 갈릴리 변두리에서 서성대었다.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빈들의 소리”는 죄인의 몸이 되어 마케러스 요새에 갇힌 몸이 되고 말았다. 요한은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 11:3)라고 물었다. 그들이 가졌던 메시아관과 그분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예언한 ‘구름타고 오시는 메시아(단 7:13)’는 줄곧 유대인의 관념에서 떠날 수 없었고, 그러한 기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듯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타오르는 굉장한 기적에서만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작고 세미한 말씀에서 알아졌다는 엘리야의 호렙산 경험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기적을 구한다”고 한탄을 했고, 그러기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오실 그분’에 대한 질문은 모든 인류가 전(全)존재를 걸고 물어야 할 실존적 질문이요, 전(全)역사를 통해서 물어야 할 민족적 질문이다. 우리의 요구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정황이 급하면 급할수록 신중히 물어야 할 질문이다. 어떤 사람(국가)들은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등에서 찾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떤 인물, 어떤 개인(경우에 따라 어떤 단체)에게서 찾는다. 가장 경계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엄청난 재앙을 보면서도 단지 고난의 현상만 바로 보게 하는 것에 아쉬운 마음이다. 그 옛날 목 베임의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두려움에 “오실 그 분이 당신이십니까?”라고 물었던 너무나 인간적인 그 세례 요한처럼 적어도 “이 일이 정녕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된 일인지요?”라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추구하고 잡아야 할 생명근원적 탄원을 해야 할 일이다.

세례요한처럼 어떤 경우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찾고 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