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은 뉴욕이나 뉴져지보다는 한결 따뜻하였음에도 지난 겨울은 지루하였다. 이리도 더디오는 봄은 이민생활 20여년 만에 처음인 듯싶다. 그래도 봄비를 촉촉이 맞은 개나리들이 수줍은 봉우리들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는 것을 볼 때 봄 같지 않은 봄이 이미 소리없이 온 것이다. 수선과 튜립의 촉들이 쏙 쏙 올라 오는 것으로 폭풍으로 부러진 가지들 사이로 흘러가는 회색 비 구름을 용서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창세이래로 쉼없이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제우스 신의 아버지였다. 크로노스는 자식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는 이 예언이 실현되지 않도록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먹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의미이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을 내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이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제우스가 태어나자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숨기고 대신 돌덩이를 크로노스에게 주어 살린다. 나중에 제우스는 장성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지하세계에 가둔다. 이 결과 시간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통제할 수 있는 신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크로노스를 희롱할 비장의 무기가 있다’ 크로노스는 나를 64년이란 세월 속에 가두었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시시때때로 카이로스로 탈출 시켜 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결코 64년이란 크로노스를 후회하지 않는다. 카이로스도 그리스의 신들 중에 하나이다. 이 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기회의 신이다. 그는 양손에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 어깨에는 커다란 날개가 있고 두 발에도 작은 날개가 있어 망설이는 순간 가차 없이 네 날개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또 앞머리는 매우 무성하여 그것이 기회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민머리라서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다.
나는 카이로스를 이용하여 새벽에 의미를 부여한다. 기회가 사라지기전에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오래된 책들을 읽는다, 그리고 그 의미들을 기록한다. 그 의미들이 차곡 차곡 쌓여서 크로노스가 카이로스가 되는 기쁨을 누린다. 만약 흘러가는 크로노스를 마냥 내버려 두었다면 내게는 샬롬과 마나스테도 없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물학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까닭에 금년의 새봄은 특별한 카이로스로 묶어서 기록하고 싶다. 누가 아랴! 나의 크로노스가 의미있는 카이로스로 히스토리에(Historie)나 게쉬히테( Geschichte)의 전설이 될지!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는 제우스 신의 아버지였다. 크로노스는 자식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는 이 예언이 실현되지 않도록 자녀가 태어날 때마다 먹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의미이다. 시작이 있는 모든 것을 끝을 내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이나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제우스가 태어나자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숨기고 대신 돌덩이를 크로노스에게 주어 살린다. 나중에 제우스는 장성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지하세계에 가둔다. 이 결과 시간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통제할 수 있는 신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나는 이 크로노스를 희롱할 비장의 무기가 있다’ 크로노스는 나를 64년이란 세월 속에 가두었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시시때때로 카이로스로 탈출 시켜 버리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결코 64년이란 크로노스를 후회하지 않는다. 카이로스도 그리스의 신들 중에 하나이다. 이 신은 눈이 보이지 않는 기회의 신이다. 그는 양손에 칼과 저울을 들고 있다. 어깨에는 커다란 날개가 있고 두 발에도 작은 날개가 있어 망설이는 순간 가차 없이 네 날개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또 앞머리는 매우 무성하여 그것이 기회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뒷머리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민머리라서 한 번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다.
나는 카이로스를 이용하여 새벽에 의미를 부여한다. 기회가 사라지기전에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오래된 책들을 읽는다, 그리고 그 의미들을 기록한다. 그 의미들이 차곡 차곡 쌓여서 크로노스가 카이로스가 되는 기쁨을 누린다. 만약 흘러가는 크로노스를 마냥 내버려 두었다면 내게는 샬롬과 마나스테도 없고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생물학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이 점점 짧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는 까닭에 금년의 새봄은 특별한 카이로스로 묶어서 기록하고 싶다. 누가 아랴! 나의 크로노스가 의미있는 카이로스로 히스토리에(Historie)나 게쉬히테( Geschichte)의 전설이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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