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란 물리적으로 2001년부터 현 시점까지의 시간을 일반적으로 말한다. 19세기 후반에 형성된 산업 사회적 기틀을 바탕으로 지금에도 지속되는 지난 시간대의 흔적들이 겹쳐지는 것으로, 달리 표현하여 ‘초 현대’라고 말하는 것이 현실성 있는 표현일 것이다.
‘초 현대’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인간의 의지와 기획’이 전면화되고 정보화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치나 사회구조는 물론 시간과 공간, 혹은 탄생과 죽음 같은 ‘신의 영역’까지 인간은 방대하면서도 치밀하게 파악해내고있다. 그리하여 공간을 확장하고 시간을 압축하게 되었으며 삶과 죽음의 비밀을 거의 알게 되었다. 이전 시대만 해도 인간은 하루의 절반만 사용했지만 현대의 인간은 밤낮 없이 활동한다. 웬만한 도시 곳곳마다 성업 중인 심야의 편의점은 인류의 일상이 쉼 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전력 사용량이 급격히 늘었지만 동시에 모든 종류의 수치까지 치솟았다. 생산량이나 소비량은 물론이고 전쟁 중의 사망이나 환경 재앙에 따른 비극적 참사는 그 이전의 인류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상상했던 종말적 순간보다 더 끔찍하게 현실화되었다.
인간의 지식과 능력은 지층에서 우주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행복한 시대를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시대이다.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수록 인간의 기획을 위반하는 대재앙이 예고되고 현실화 되는 시대가 곧 ‘초 현대’이다. 인류의 새로운 삶은 이 양 극단의 모순 속에서 출발한다. 희망과 절망이 서로 다른 차원에 있지 않다.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이 되어 겹쳐져 있는 상황, 즉 희망의 메시지가 절망의 유언서가 되고,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인식이 새로운 희망의 근거가 되는 지평 위에 인류는 서 있다.
무엇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 과거에는 인생을 먼저 경험한자의 ‘삶의 지혜’나, 성직자의 조언, 전문가와의 상담에서 얻은 방안이 선택의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고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사회의 각종 사건 사고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 다양성과 선택의 폭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에서 일어난 “KAIST 개혁”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필자는 처음 이 사건을 접하며 씁쓸함을 금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 학생들의 학습 능력에 비례하여 수업료에 차등을 두는 것일까? 대학이 인격을 갖춘 지도자를 양성하는 상아탑임을 포기한지가 한참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다량의 지식 소유의 유무만으로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고 특혜를 준다는 것은 편협함과 옹졸함의 극치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에서 지적 능력이 차지하는 부분은, 감정과 의지와 지식 중 33%에 불과하다. 사회에서 소위 “가방 끈 짧은 사람” 들도 성공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또한 초 현대 사회에서 EQ의 중요성이 IQ의 중요성보다 더 강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는 일단의 개혁들을 일부 부작용으로 치부하고 부분적 수정을 거쳐 계속해서 추진해 나가기로 결정한 것 같다. 대학의 특성상 고뇌에 찬 결정이지만, 어찌보면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시험기계’들의 당연한 결정이라 할 것이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금번 사건으로 인하여 제 각기의 의견과 지지를 표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모든 판단과 생활 규범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며, 또한 자식을 성장 과정의 다양함을 경험하며 양육하여 사회의 한 가치있는 인원으로 성장시킨 부모의 시각으로 바라 볼 때, 더욱 고민하며 시간을 갖고 결정하여야 할 사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학의 더 좋은 성과가 필요한 것이고, 경쟁이 발전의 원동력이 됨은 부인할 수 없지만, 상아탑의 정서적 황폐함을 당연지사로 여기던 학생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싫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초 현대’를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인간의 의지와 기획’이 전면화되고 정보화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정치나 사회구조는 물론 시간과 공간, 혹은 탄생과 죽음 같은 ‘신의 영역’까지 인간은 방대하면서도 치밀하게 파악해내고있다. 그리하여 공간을 확장하고 시간을 압축하게 되었으며 삶과 죽음의 비밀을 거의 알게 되었다. 이전 시대만 해도 인간은 하루의 절반만 사용했지만 현대의 인간은 밤낮 없이 활동한다. 웬만한 도시 곳곳마다 성업 중인 심야의 편의점은 인류의 일상이 쉼 없이 반복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전력 사용량이 급격히 늘었지만 동시에 모든 종류의 수치까지 치솟았다. 생산량이나 소비량은 물론이고 전쟁 중의 사망이나 환경 재앙에 따른 비극적 참사는 그 이전의 인류가 종교적인 차원에서 상상했던 종말적 순간보다 더 끔찍하게 현실화되었다.
인간의 지식과 능력은 지층에서 우주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반드시 행복한 시대를 만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시대이다. 인간의 의지가 작용할수록 인간의 기획을 위반하는 대재앙이 예고되고 현실화 되는 시대가 곧 ‘초 현대’이다. 인류의 새로운 삶은 이 양 극단의 모순 속에서 출발한다. 희망과 절망이 서로 다른 차원에 있지 않다.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이 되어 겹쳐져 있는 상황, 즉 희망의 메시지가 절망의 유언서가 되고,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인식이 새로운 희망의 근거가 되는 지평 위에 인류는 서 있다.
무엇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 과거에는 인생을 먼저 경험한자의 ‘삶의 지혜’나, 성직자의 조언, 전문가와의 상담에서 얻은 방안이 선택의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고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사회의 각종 사건 사고들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그 다양성과 선택의 폭 또한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에서 일어난 “KAIST 개혁”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필자는 처음 이 사건을 접하며 씁쓸함을 금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 학생들의 학습 능력에 비례하여 수업료에 차등을 두는 것일까? 대학이 인격을 갖춘 지도자를 양성하는 상아탑임을 포기한지가 한참은 오래되었다고 하지만 다량의 지식 소유의 유무만으로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고 특혜를 준다는 것은 편협함과 옹졸함의 극치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격에서 지적 능력이 차지하는 부분은, 감정과 의지와 지식 중 33%에 불과하다. 사회에서 소위 “가방 끈 짧은 사람” 들도 성공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또한 초 현대 사회에서 EQ의 중요성이 IQ의 중요성보다 더 강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는 일단의 개혁들을 일부 부작용으로 치부하고 부분적 수정을 거쳐 계속해서 추진해 나가기로 결정한 것 같다. 대학의 특성상 고뇌에 찬 결정이지만, 어찌보면 (부정적으로 표현하여) ‘시험기계’들의 당연한 결정이라 할 것이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도 금번 사건으로 인하여 제 각기의 의견과 지지를 표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모든 판단과 생활 규범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으며, 또한 자식을 성장 과정의 다양함을 경험하며 양육하여 사회의 한 가치있는 인원으로 성장시킨 부모의 시각으로 바라 볼 때, 더욱 고민하며 시간을 갖고 결정하여야 할 사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학의 더 좋은 성과가 필요한 것이고, 경쟁이 발전의 원동력이 됨은 부인할 수 없지만, 상아탑의 정서적 황폐함을 당연지사로 여기던 학생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싫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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