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해를 불치의 암으로 고생하던 엄마의 부탁으로 목을 졸라 안락사 시킨 딸이 너무 괴로워 자살을 시도했다가 불발에 그친 사건이 발생, 죄를 물어야 하는지를 놓고 지금 한국법정이 고민 중이다.

안 그래도 한때 영화배우 최진실 자살사건을 두고 “구원(救援)이네, 아니네,...” 하며 일부 목사들이 섣불리 언급한 것이 문제가 되어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던 교회들이 여럿 있었지만,....때마침 한국인의 자살자 수가 한해 만5천4백 명을 넘는다는 통계청의 발표가 나오면서 드디어 OECD 회원국들 중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까지 안게 됐다.

문제는 자살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극단적인 기독교인들의 경솔한 비평들이다. 이를테면 사는 게 죽기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이유로 너도나도 목숨 버리기를 초개(草芥)같이 한다면 생명을 주신 창조주에 대한 범죄행위가 아니냐며 타살도 자살도 다 같은 살인죄에 해당된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살도 자살 나름이라는 반론도 만만찮다. 나라를 위한 애국성 자살이 있는가하면 수절을 위한 열녀성 자살도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성경책을 가슴에 품고 음독하는 사람에다 기도까지 드리고 교회 천정에 목을 맸다는 사람마저 생겨나는 판국에,...외형상으로 나타난 동작만으로 자살을 무슨 큰 범죄사건인양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진보성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 하면 최진실처럼 극약을 마셨건,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건, 호흡이 끊기고 피가 멈춰서기까지 아직도 실낱같이 붙어있는 생명, 그것이 곧 피조물인 자살자의 영혼이 조물주인 하나님을 마지막으로 대면할 수 있는 찰나적 기회가 아니겠나 해서다. 그 기회라는 게 길게는 몇 분이고, 짧게는 10초나 5초, 아니 단 1초의 눈 깜짝할 빠른 순간일 수도 있지만 그때 무슨 생각을 마음속에 품었느냐에 따라 비로서 자살자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갈릴 수 있다는 게 필자의 소신이다. 즉 자살 결행시에 품었던 처음 생각이 반짝하는 순간 얼마든지 다른 생각으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비밀 속에 눈으로 확인불가한 자살의 진실이 숨겨져 있고 그걸 아시는 분은 오로지 인간생사의 여탈(與奪)권을 쥐고 있는 하나님뿐이란 사실을 말이다.

필자가 이미 “진실 너를 사랑하기에” 란 제하의 쓴 소리(그리운 풍금소리 152P)끝줄에서 “....최진실 이 얼마나 진실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진실이다.” 라고 피력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만,...목숨을 너무 경시하는 풍조가 문제이긴하나 그렇다고 남의 영혼가지고 툭하면 “지옥이니, 뭐니” 하는 무책임한 말버릇, 특히나 종교인들은 삼가야 한다. 안 그러면 자칫 창조주만의 고유영역을 넘어서는 잘못을 범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