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스마예배의 주체이며 모든 예배자에게 생명의 능력을 부여하는 수혜자로서의 새로운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카리스마적 영성과 접촉 가능한 해석지평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역사적 과정 안에서의 활동을 근거로 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은 더 이상 유럽신학의 ‘내재하는 하나님’이 지닌 사상과 관념만의 기존 전통 신앙인들만의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세계 지향적 활동성의 주체이자 관심자로서 신음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지상에 개입 하는 분으로서의 성령이라는 새로운 하나님의 구속 사건의 해석을 가능케 한다.
즉, 이러한 성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카리스마운동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 지상에 개입한다는 이 “보편적 단언”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를 강조하고 있는 피터 와그너나 존 윔버와 의식지평을 같이 한다. 이 능력대결은 서구인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자기 영웅주의 혹은 ‘승리주의’의 약점으로 보이지만 제 3세계 혹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갈구하는 모든 신앙은 다른 차원에서의 필요를 느낀다.
성령이 우리들의 시대에 직접 개입하시고 관영하신다는 개념과 더불어 몰트만은 전통적인 분석적인 본체론적 해석으로부터 탈피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을 사역 중심로 해석하려 한다. 즉 삼위는 돌아가시면서 순환적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게 사역하심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삼위는 결정적인 자기 역할 안에 갇히지 아니 하신다. 즉,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만을 나누어서 지시는 분은 아니다. 오늘날은 더 이상 아버지와 아들의 사역이 중심이 아닌 성령의 사역이 중심이 될 시점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에게 자신들의 신뢰를 보낸다. 따라서 현재는 아들을 통한 성령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성령이 중심이 되는 성령세례는 모든 카리스마영성의 중심이 된다.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히심을 받았다는 축복, 즉 ‘두 번째의 축복’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결의 또 다른 영향력으로 나타난다. 웨슬리의 신학에서는 성령은 구원을 확증하거나 축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피니의 신학에서는 ‘성결의 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러나 토리에게서의 성령은 전도와 사역을 위한 영으로 설명된다.
이 때문에 토리의 성령론은 성결에 대한 취약성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 오순절신학에 윤리적 강조가 옅어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카리스마운동에 속하는 교회들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오순절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기목사도 이에 동조하면서 지금은 성령이 삼위일체를 대변하여 역사 하는 시대임을 주장한다. 지난 이 천년 이래 성령은 자신의 시대를 맞이하고 계신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계시고 교회와 세계 안에 계신다.
이 성령의 시대에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도록 길을 여시며 또 한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 그리스도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주역임을 강조했던 본회퍼의 신학 역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발전적인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삼위일체의 각 개체성을 강조함과 또한 성령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각 개체로부터 전체 삼위일체성으로 회기하는 신학이 부재하고 있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은 삼위일체간의 연합을 강조한 점이다. 이는 몰트만 신학의 삼위일체 개념과 일치하기도 한다. 그리고 조용기목사가 성령의 역사를 그리스도 사역 이후에 오는 모든 시대로 규정하는 인식은 요아킴 피오레스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그는 최초의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로 구분한 사람이었다.
성령에 대한 새로운 카리스마적 영성의 인식은 전통적 정통교회들이 상실하고 있던 성령에 대한 신학과 신앙을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카리스마영성의 지도자들은 성령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 영성을 새로 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탈 신학적 탈 인격적 위험의 요소 또한 지니고 있다. 카리스마 지도자들, 혹은 은사자로부터 들리는 가슴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은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닌,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향하고 있는지가 항상 검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의 연합과 유익을 위해서는 각 개인들의 하나님 음성 듣기는 통제되어야 한다. 각 예언과 깨달음 간에 충돌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성경적으로 검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되지 않는지, 또한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지,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가 시험되어져야 한다.
성령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주장하는 카리스마적 영성의 기초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홀렌버거의 말처럼 근본주의 신학을 자신의 신학적 논리로 재편성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신학적 비평을 통하여 성경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근본주의적 신앙의 태도들을 카리스마 운동을 지향하는 오순절교회들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근본주의 신앙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자유주의 사상과 진화론적 사고를 배경으로 하는 과학주의, 그리고 사회복음적 사상을 거절한다. 오히려 카리스마 영성을 배경으로 하는 교회들은 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나 교리적 전통보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중요시한다. 그들에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대체로 문자적인 해석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경험으로 성서해석을 믿음의 원리 안에서 이해한다.
카리스마 영성에서는 성경의 존재의 위치는 성령의 위치보다 결코 높지 않다. 그 이유는 적어도 카리스마교회의 인식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을 통한 경험을 통해 초대교회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교회의 가르침을 교회들에게 전수했다. 그들에게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이 익숙해 있었고, 초대교회를 본받아야 할 전형으로 생각하고 있는 카리스마교인들이 성경 그 자체보다 성령의 지시를 귀 기울이는 데에는 역사적인 전통이 이미 있어 왔던 것 때문이다. 카리스마 교인들의 성령의 음성을 듣는 방식은 부정적인 부분도 있다.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마음 문을 닫고, 오히려 성령의 말씀이라는 진정한 분별없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영 분별의 필요가 더욱 대두되기도 한다. 때문에 카리스마 지도자들은 자신의 마음으로 들려오는 소리와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 때로는 긴장관계를 발견하고 그 간격을 메우려고 인간적인 노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대체로 부정적으로 결론을 맺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얻어진 자신의 경험적인 사건 때문에 가장 근본적인 신학적 가르침조차도 무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스 디히터 라이머의 주장에 따르면,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몇 가지의 약점들 앞에 노출되게 된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성서해석을 시도하게 되고, 오직 자신의 경험과 주된 영적 체험과 관련된 사건만을 취사선택 강조하게 된다. 분명히 성경을 축소하거나 과장 확대하게 된다. 둘째로 카리스마 지도자들은 전통적 개혁교회들이 강조해 왔던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난을 통한 구원의 길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존귀하게 되심과 영광만을 강조한 나머지 ‘영광의 신학’ 혹은 영광의 축복만을 외치게 되는 우를 범한다. 복음의 전제조건과 그 결말이 도취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셋째로 카리스마 운동의 문제점은 극히 개인적인 경험도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로 인해 일반적인 경험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성경의 규범적 사건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때문에 성경은 오직 율법적인 지침서 혹은 규범서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레리 크리스텐슨은 카리스마교회들의 신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는 카리스마교회들의 해석학은 대체로 루터신학과 기본 골조(骨彫)를 같이 한다고 주장한다. 즉, 카리스마교회들이 복음제일주의적 태도와 복음과 율법을 확연히 구별하고 있는 점, 성경의 중심에 예수를 놓는 것, 구원론에 대한 강조, 철학적 사조가 배제된 역사비평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것을 든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카리스마교회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사상이며, 그리스도가 대속주이며 또한 새로운 부활을 통한 새 창조를 가져다주는 찬양받으실 분이라는 고백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그는 카리스마교회가 성령이 몰고 오시는 종말론적인 지평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을 이해한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한다.
결국 카리스마 영성과 교회들의 문제는 균형에 달려 있다. 말씀과 성령, 그리스도의 수난 신학과 부활의 영광의 신학, 개인의 경험과 성경의 일반적인 경험 사건, 이 모든 것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의 문제를 균형 잡는 일만이 해결의 실마리일 것이다. 말씀은 객체가 되고 성령이 주체가 되어 우리들에게 역사하시도록 길을 열어 드리는 일의 중요성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교훈은 성령 없이 율법에만 메어 있는 전통적인 교회들이 받아야 할 충고이다. 그러나 성령을 이해하는 우리들의 약점은 언제나 성경을 통해 검증되어야 하고 보완되어야 한다. 성령을 강조하면 신비주의에 빠지고, 말씀만을 강조하면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은 양자간의 균형을 상실한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참 인식은 모든 복음주의의 내용이 된다. 그러나 부활이 없는 십자가의 죽음은 세계를 비관주의로 몰고 간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며 구체적으로 답변하신다는 확신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확신은 우리가 취해야할 또 다른 복음이다. 문제는 수난과 부활 사이의 관계를 이어가는 균형 잡힌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20/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오순절 전통의 카리스마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도 바로 이 점이다.
그리고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경험과 성경의 일반적 경험과의 충돌의 문제는 첫째는 우선순위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개인의 경험은 성경의 사건의 예로서 검증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때로 카리스마적인 경험은 개인의 신앙 확신을 도울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좋은 규범과 소망을 제시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김호환 박사의 신학단상 (8)
성령과 카리스마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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