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지진의 비극을 두고 하나님의 심판론을 제기했다가 혼쭐나는 목사가 있다. 그게 이 시점에서 할 소리냐고 같은 교단의 목사들조차 비난일색이다. 또 어떤 버르장머리없는 젊은이는 정신병자 운운까지 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징조는 계속해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워 왔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기독교의 종말관을 비웃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적 개념이 없다고 한다. 2천년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말세라고 하니 저들의 시간개념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종말시기는 카이로스를 말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시 공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인 까닭에 크로노스적 이해를 탓할 수 만은 없으나, 현대의 종말론적 구원이 초대 기독교들의 종말론적 구원보다는 훨씬 가까운 것만은 사실이 아닌가?

초대 교회들은 그들의 때에 파루시아(주님의 재림)가 이루질 것이라고 굳게 믿은 점이 없지 않다. 사실 사도 바울이 당시의 땅 끝이라 생각하였던 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던 이면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세기의 순교자들보다 이들의 때에 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던 이면에는 이런 카이로스적 시기를 크게 깨달었던 때문이다.

오늘 21세기의 선교는 양만으로 따지면 전무후무한 발전을 이루고 있다. 선교 1세기가 조금 넘는 한국이 파송한 선교사들 만해도 수만명이 넘는다. 그러나 저들이 선교지에서 순교하였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물론 순교를 조장하는 말은 아니다.

일세기 초의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자로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의 교회가 선교지에서 순교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카이로스적 종말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태도는 무엇이어야 할까? 이 시기를 제대로 아는 일이다. 그리고 깨여 있어야 한다.

오늘의 교인들은 지식적으로는 전 시대보다 놀랍게 깨였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경지식은 전시대의 신학자들보다 더 풍성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만나보기 어렵다. 이를 제일 먼저 감지한 사람들이 바로 제자훈련으로 양적 부흥을 가져온 지도자들이었다. 이들 중에 양심적인 분들은 고민하고 자책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성령운동으로 급회전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있다. 무슨 관상기도니 열린 예배니, 중보기도니 하는 프로그램들을 도입하여 교인들을 영적으로 깨여있게 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가상하다.

그러나 교회 성장과정에서 보여준 그 달콤한 맛을 떨쳐 버리기는 역부족인 것 같다. 그래서 겉으로는 영적각성을 부르짖고 있지만 여전히 영적으로는 깊은 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벽기도회가 만원이지만 사람들의 신앙 윤리는 고사하고 세상 일반 윤리에도 못 미치니 개독교 소리를 듣는 것이다. 종말론적 신앙을 비난하고 이 세상이 그리도 좋은지 이 세상에서 온갖 죄를 지으면서 까지 누리는 이중적 생활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일본이 침몰 위험수위까지 온 이때도 역사적인 종말,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이 우리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각 개인의 종말은 그리 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살 날이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여기에 종말론적 구원의 호소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