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사랑을 받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쁜 짓을 하는 귀여움 때문입니다. 강아지, 병아리, 아기 원숭이는 새끼 때에 귀엽고 예쁩니다. 고슴도치도 새끼 때에는 귀엽고 예쁩니다. 새끼들이 귀여운 것은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새끼가 귀엽지 않으면 누가 키우겠습니까? 그래서 새끼들은 약하고 귀여운 것입니다. 보호 본능과 사랑의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 입니다. 고릴라에게 그림을 선택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바나나, 사과, 아기 고양이 그림을 보여주었습니다. 고릴라가 예쁜 아기 고양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새끼는 귀엽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건국 신화에 늑대 소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늑대가 아기를 키웠습니다. 약한 존재는 귀여움을 통해서 생존하는 것입니다. 약하면 귀엽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인의 자세는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전혀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세는 자만이었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 리스트, 행위 리스트, 자랑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자기 부인에서 시작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로 시작합니다.
주님! 나는 이 상태로는 안 됩니다. 나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나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를 귀엽게, 예쁘게 여겨달라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예쁘게 놀지 않습니다. 너무 똑똑하고 강한 척만 합니다. 어느 구석에도 은혜를 구하거나, 불쌍히 여김을 구한다는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귀엽게 살아야 하고 예쁘게 살아야하는데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귀여움을 잃거나 예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잃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의란 좋은 관계를 맺을 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좋은 관계가 깨졌다는 말은 의가 깨졌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귀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기 생각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인데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공격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로 보지 못하고 자기 입맛으로만 보게 됩니다. 독선적인 사람은 전혀 귀엽지가 않습니다. 성숙이란? 입장을 달리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범일지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아들을 회초리로 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흔이 넘은 아들이 회초리로 맞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파서가 아닙니다. 예전에 비해 어머니의 힘이 많이 빠지셨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줄 아는 자세가 성숙입니다. 편협에서 벗어나 귀여워져야 하고 예뻐야 합니다. 이래야 좋은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인의 자세는 낮추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전혀 귀엽지도 예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의 자세는 자만이었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리스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교 리스트, 행위 리스트, 자랑 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을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자기 부인에서 시작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로 시작합니다.
주님! 나는 이 상태로는 안 됩니다. 나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나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나를 귀엽게, 예쁘게 여겨달라는 자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이 예쁘게 놀지 않습니다. 너무 똑똑하고 강한 척만 합니다. 어느 구석에도 은혜를 구하거나, 불쌍히 여김을 구한다는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귀엽게 살아야 하고 예쁘게 살아야하는데 이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귀여움을 잃거나 예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신앙의 본질을 잃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에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의란 좋은 관계를 맺을 때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좋은 관계가 깨졌다는 말은 의가 깨졌다는 말이 됩니다.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귀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기 생각만 옳다고 합니다. 그것이 자기 생각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 것인데 그것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듣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공격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체로 보지 못하고 자기 입맛으로만 보게 됩니다. 독선적인 사람은 전혀 귀엽지가 않습니다. 성숙이란? 입장을 달리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백범일지에 김구 선생의 어머니가 아들을 회초리로 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흔이 넘은 아들이 회초리로 맞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파서가 아닙니다. 예전에 비해 어머니의 힘이 많이 빠지셨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줄 아는 자세가 성숙입니다. 편협에서 벗어나 귀여워져야 하고 예뻐야 합니다. 이래야 좋은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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