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에서 매일 없으면 안되는 게 바로 자동차입니다. 그래서 좋은 자동차를 탄다는 것은 할 수 만 있다면 저는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 합니다. 제가 최근에 차를 바꾸었는데 전에 타던 차에 비해서 경제적인면은 있는데 여간 승차감이 엄청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2시간씩 보통 운전을 한다면 대략 인생의 1/10을 차에서 보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더 투자를 한다고해서 여건만 된다면 저는 가치가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정비를 하지 않으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이 자동차를 관리하는 것을 보면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정비형이고 하나는 수리형입니다. 정비형의 사람은 평소에 기름을 치고 닦고 채울것은 채워주고, 갈아야 하는 부품은 갈아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차가 도로 중간에 서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에 수리형의 사람은 망가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정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으로 중요할 때 자동차가 말썽을 일으켜서 고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잘 달리다가도 고속도로에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여행을 가는 도중 그만 산간 오지에서 차가 멈추어 버려 낭패를 당합니다. 자동차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도 이렇게 정비형과 수리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시험이 오기 전에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는 성도가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 얻어 맞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수리형 성도는 겉보기에는 매우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믿습니다만 말하면 다 되는 줄 압니다. 아멘만 한다고 차가 고장이 안나는게 아니지요. 믿습니다라는 말만 한다고 영적인 성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말로만 다 때우려고 하는 외식적인 신앙이며 어찌보면 신앙의 교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데 기도 안하면서 믿습니다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자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라는데 말씀을 배우지 않고 자기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살려고 한다면 그것도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하고 있는 자들을 찾으시며 준비된자들을 들어 쓰시는분인줄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마치면서 이런 준비된 자세로 하나님의 교회와 바울의 선교를 도왔던 많은 사람들에게 문안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큰일을 치룬 한 사람이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과 편안한 시간을 갖는 모습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중에서도 책 중의 책이 로마서라고 말합니다. 이 로마서에서 구원에 대한 놀라운 복음을 선포한 바울은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바꾸면서 자신이 감옥에 갔을 때 같이 가주었고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자신을 격려해 주었던 사람들에게 문안하고 개인적으로 교제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개인적인 문안과 교제의 결론이 나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노라”크리스천의 교제란 거룩한 입맞춤입니다. 입맞춤은 아무하고나 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깊은 사이이거나 특별한 사이에서만 입맞춤을 합니다. 크리스천이란 입 맞추는 관계입니다. 가슴과 가슴으로 안아주고 마음과 마음을 모두 쏟아주는, 천국의 교제를 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는 주일날 잠깐 왔다가 가는 곳입니다. 가족끼리 만나는 것 그 이상의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시작은 있지만 끝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새교회 성도들의 관계가 거룩한 입맞춤이 있는, 바울과 그의 제자들과의 관계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의 염려

16절까지 문안을 마치고 난 바울은 17절에서 또다시 분위기를 바꿉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특별한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17절부터 나오는 권면은 아주 의외로 특별한 것입니다. 앞뒤 문맥이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위대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크리스천의 삶을 말했던 바울은 개인적으로 사람들과의 교제를 하던 중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를 말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갑자기 이런 경고를 마지막으로 하고 있을까요? 추측해 보건대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하루아침에 다 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서 썼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나 일종의 권력투쟁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지배하고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결국은 힘싸움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소외된 사람은 항상 그 집단속에서 불평과 불만을 표출하면 결국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 사회와는 달리 교회에서 이러한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는 일이기에 우리는 매우 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교훈을 거스릅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말로 궤변을 만들고 헛소문을 만듭니다. 성경의 말씀을 자기식으로 합리화시킵니다. 억지로 앞뒤가 맞지 않게 풀어서 자기의 이론을 만듭니다. 한 과학자가 벼룩의 특성을 살피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으로 벼룩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벼룩의 한 다리를 끊어 내면서 "뛰어!"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 벼룩은 즉시 펄쩍하고 뛰었습니다. 한 다리를 더 끊어 내며 다시 "뛰어!"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벼룩은 또 뛰었습니다. 이 과학자는 이 같은 명령을 계속하며 여섯번째인 마지막 다리만 남겨 놓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는 벼룩이 뛰기가 좀 힘들어졌지만 나름대로 뛰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과학자는 드디어 마지막 다리까지 잘라버리고 또 뛰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벼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과학자는 목소리를 높이며 명령을 했습니다. "뛰어!" 여전히 벼룩은 반응이 없었습니다. 과학자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명령했습니다. "뛰어!" 그러나 불쌍한 벼룩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과학자는 다음과 같이 연구의 결론을 내렸습니다. "벼룩의 다리를 모두 제거해버리면 벼룩은 청각을 상실해 버리게 된다." 여러분! 웃기지 않습니까? 벼룩이 뛰지 못하는 이유는 다리가 잘라졌기 때문이지, 청각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과학자는 벼룩이 뛰지 못하는 이유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 생활은 영적인 혼동과 무질서를 일으킵니다.

목사의 교훈도 공공연히 무시하고, 장로의 권면도 묵살 해버립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교회의 질서를 사람들은 무시해도 되는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릇된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 한다면 그것은 그 공동체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불행이 될 것입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