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통 가나안 땅 이라고 하는 땅은 요단강 서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광야를 우회해서 요단강 동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옵니다. 요단강 동쪽은 목초지로 좋은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축이 많았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절반은 동쪽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소유가 많음으로 인하여 발이 묵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에도 소원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유의 많음으로 인해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스스로 눌러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소유의 많음이 재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에 동쪽 지파는 제일 먼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약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인생도 동쪽 지파와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우수개소리로 롯이 왜? 소돔에 갔을까? 물었을 때 어떤 학부모가 아이들 교육 때문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한국 부모의 시각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부요했던 소돔은 죄악의 땅, 자녀들을 죽이는 땅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의 표준으로 눈을 돌리는 순간 넘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하나씩은 있습니다. 신앙으로 풀어가야 하나? 인간적인 욕심으로 풀어가야 하나? 하는 갈림길에 설 때가 있습니다. 이때의 결정은 현명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손해가 나는 것 같아도 신앙적인 판단의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잘못 결정하게 되면 주어졌던 모든 기회를 다 놓쳐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 쓸모없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눅14:33절에서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하나님의 나라는 버리고 가는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가족과 배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수도사들이 광야로 간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많음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옅습니다. 광야는 버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채워지는 역설이 있는 곳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일본 재건을 위해서 서방 교사를 파송했습니다.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인솔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으로 패배한 나라이기 때문에 가르치기가 쉽다. 승리한 국가는 자부심을 갖기에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패자는 겸손함으로 배우려 한다.” 이 말은 이기는 것이 좋지만, 자세는 패자의 겸손이 더 좋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억지로 요구해도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는 “기뻐하시는 뜻”과 “허용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왕을 달라고 하니까 주십니다. 요단 동쪽 땅을 달라고 하니까 주십니다. 허용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허용은 부작용이 많습니다. 억지로 요구한 왕이 압제를 합니다. 고기를 달라고 하니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광야에는 물이 부족합니다. 닭과 같은 새를 물 없이 먹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온통 비린내와 끈적임으로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구한 것이 해로운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시 106:15) 하나님이 함께 하면, 아주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으면, 풍부함으로도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