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에피소드는익명성을 위해서 당사자들의 신분과 이름, 상황 등은 각색이 되었음을 알림)
박집사님은 일하고 있던 가게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최근에 미국 이민을 와 한 중소도시의 고등학교로 전학한 지 얼마 안된 둘째 아이의 학교 상담교사로 부터 온 것이었다. 둘째 성철이의 학교에서의 행동이 문제가 되어 교장실을 거쳐 상담교사인 자기에게 의뢰되어 상담을 한 후 긴히 의논을 해야 하니 곧 학교로 와달라는 호출전화였다. 갑작스런 전화에 당황도 되고 이민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영어로 어찌 소통해야 할까 하는 긴장과 염려도 있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마음속으로 아이가 원망이 되기도 하는 중에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 상담실에 도착하여 불려와 있는 둘째를 보자마자, “도대체 무슨 일이야?”를 외친다.
박집사님을 진정시키고 난 상담교사는 성철이가 학급에서 선생님 지도를 잘 받지 못하고 무시하며 학급에도 참여를 하지 않고 무엇보다 선생님께 대하는 태도가 문제라며 이대로는 학급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황망한 사실을 전한다. 학교에서 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벽력같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도는 중에 “성철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다.성철이는 “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단 말이야!”라고 볼멘 소리로 대답하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표시한다.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선생님들이 나를 불러서 자꾸 잘못했다고 뭐라고들 그러느냐 말이야?” 실제로 성철이는 불량한 학생이 아니었고 한국의 학교에서도 온순하고 성적이 괜찮았던 아이였다. 고민 중에 상담학을 전공한 부목사님에게 의뢰하여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던 것은, 성철이가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학급활동에 참여하지도 손을 들고 열심히 발표, 대답하지도 않고, 지적하는 선생님의 앞에서 눈을 바로 쳐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수그리고 선생님을 무시(?)하여서 결국 교장선생님에게까지 불려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엄한 아버지 밑에서 그리고 한국문화 속에서 성장한 성철이가 어른 얼굴을 똑 바로 쳐다 보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된 성철이가 학급에서 열심히 질문과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영어가 익숙지 않아서였으며, 또 말에 실수하면 놀림을 당할 까봐 가만히 있었던 것이 오해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백인교사나 백인 주류문화권 속의 교사들과 상담자들은 손을 적극적으로 들고, 선생님과 눈을 바로 마주보고 자기 의견을 분명히 표시하는 학생을 소위 ‘선생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바로 보이고 적극적으로 학급활동에 참여하는 모범생’으로 간주하는 연고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차이점들이 문제아닌 문제들을 만든 것이다.
현저한 문화차이로 말미암 발생하는 오해들로 인한 이런 일들은 소수 인종계의 가정들이 어처구니 없게도 왕왕 경험하는 일들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유사점들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나 흑인들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행여 잘못 다루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로 인해서 아이가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비뚤어져 나가는 더 큰 문제를 갖게 될 수 있다. 심지어는 한 가정이 파괴되어질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비극들로 발전될 수도 있다. 다행히 이런 이종문화간의 차이점들을 이해하는 전문가들이나 사역자들이 매개가 되어 도움을 제공할 때 적절히 극복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요 습관의 차이이다. 어떤 일들을 하는 방식의 차이이며 그리고 상대를 향해서나 상대들로 부터 ‘기대되어지는 양식들의 차이’이다. 가족 간의 갈등의 문제나 다른 사람들과의 많은 인간관계의 문제들도 이런 ‘차이점들’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각자는 이런 ‘사람 사이의 차이점들’을 어떻게 응대하고 그로 인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가고 있는가? 관계의 회복과 갈등의 해결은 이런 차이점들을 극복하는 이해와 수용, 양보와 용서, 그리고 조화와 화합의 노력들로 가능하다. 한 걸음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손상이 우리가 겪고있는 죄와 사망, 갈등과 고통들을 초래했다고 증거한다. 결국, 인간문제의 회복과 해결의 일들은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말미암고, 이는 그 말씀에 주목함으로 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일치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교정으로 가능하며,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우리를 회복토록 도우신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이라는 일상 속에 하나님의 기대와 우리 현실의 차이들을 어떻게 좁혀가고 있는 중일까….?
박집사님은 일하고 있던 가게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다. 최근에 미국 이민을 와 한 중소도시의 고등학교로 전학한 지 얼마 안된 둘째 아이의 학교 상담교사로 부터 온 것이었다. 둘째 성철이의 학교에서의 행동이 문제가 되어 교장실을 거쳐 상담교사인 자기에게 의뢰되어 상담을 한 후 긴히 의논을 해야 하니 곧 학교로 와달라는 호출전화였다. 갑작스런 전화에 당황도 되고 이민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영어로 어찌 소통해야 할까 하는 긴장과 염려도 있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마음속으로 아이가 원망이 되기도 하는 중에 학교에 도착한다. 학교 상담실에 도착하여 불려와 있는 둘째를 보자마자, “도대체 무슨 일이야?”를 외친다.
박집사님을 진정시키고 난 상담교사는 성철이가 학급에서 선생님 지도를 잘 받지 못하고 무시하며 학급에도 참여를 하지 않고 무엇보다 선생님께 대하는 태도가 문제라며 이대로는 학급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황망한 사실을 전한다. 학교에서 더 공부를 할 수 없다는 벽력같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눈물이 핑도는 중에 “성철아 도대체 무슨 일이야?”라고 묻는다.성철이는 “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단 말이야!”라고 볼멘 소리로 대답하면서 자기의 억울함을 표시한다. “내가 뭘 어떻게 했길래 선생님들이 나를 불러서 자꾸 잘못했다고 뭐라고들 그러느냐 말이야?” 실제로 성철이는 불량한 학생이 아니었고 한국의 학교에서도 온순하고 성적이 괜찮았던 아이였다. 고민 중에 상담학을 전공한 부목사님에게 의뢰하여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던 것은, 성철이가 학교에서 적극적으로 학급활동에 참여하지도 손을 들고 열심히 발표, 대답하지도 않고, 지적하는 선생님의 앞에서 눈을 바로 쳐다 보지도 않고 고개를 수그리고 선생님을 무시(?)하여서 결국 교장선생님에게까지 불려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엄한 아버지 밑에서 그리고 한국문화 속에서 성장한 성철이가 어른 얼굴을 똑 바로 쳐다 보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미국에 온 지 얼마 안된 성철이가 학급에서 열심히 질문과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영어가 익숙지 않아서였으며, 또 말에 실수하면 놀림을 당할 까봐 가만히 있었던 것이 오해의 근원이 되었던 것이다. 백인교사나 백인 주류문화권 속의 교사들과 상담자들은 손을 적극적으로 들고, 선생님과 눈을 바로 마주보고 자기 의견을 분명히 표시하는 학생을 소위 ‘선생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바로 보이고 적극적으로 학급활동에 참여하는 모범생’으로 간주하는 연고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문화적 차이점들이 문제아닌 문제들을 만든 것이다.
현저한 문화차이로 말미암 발생하는 오해들로 인한 이런 일들은 소수 인종계의 가정들이 어처구니 없게도 왕왕 경험하는 일들이다. 흥미롭게도 이런 유사점들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나 흑인들 문화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행여 잘못 다루게 되면 아무것도 아닌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로 인해서 아이가 비행청소년이 되거나 비뚤어져 나가는 더 큰 문제를 갖게 될 수 있다. 심지어는 한 가정이 파괴되어질 정도의 고통을 경험하게 되는 비극들로 발전될 수도 있다. 다행히 이런 이종문화간의 차이점들을 이해하는 전문가들이나 사역자들이 매개가 되어 도움을 제공할 때 적절히 극복할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요 습관의 차이이다. 어떤 일들을 하는 방식의 차이이며 그리고 상대를 향해서나 상대들로 부터 ‘기대되어지는 양식들의 차이’이다. 가족 간의 갈등의 문제나 다른 사람들과의 많은 인간관계의 문제들도 이런 ‘차이점들’로 인하여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각자는 이런 ‘사람 사이의 차이점들’을 어떻게 응대하고 그로 인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 가고 있는가? 관계의 회복과 갈등의 해결은 이런 차이점들을 극복하는 이해와 수용, 양보와 용서, 그리고 조화와 화합의 노력들로 가능하다. 한 걸음 나아가,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손상이 우리가 겪고있는 죄와 사망, 갈등과 고통들을 초래했다고 증거한다. 결국, 인간문제의 회복과 해결의 일들은 근본적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으로 말미암고, 이는 그 말씀에 주목함으로 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일치하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교정으로 가능하며, 우리가 구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우리를 회복토록 도우신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이라는 일상 속에 하나님의 기대와 우리 현실의 차이들을 어떻게 좁혀가고 있는 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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