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주제는 생소한 개념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연관을 지닌 의미를 소지 한다. 십자가가 있어도 부활의 영이자 곧 희망찬 미래의 비전의 영이신 성령이 없으면 암울한 비관적인 현실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으로 성령은 있으나 십자가가 없으면 진정한 피 흘림의 구원과 희생 없는, 단지 영광과 빈 승리만을 외치는 영웅주의에 빠지게 된다. 때문에 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주제는 참다운 영성의 길을 위한 균형을 제시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언급하자면, 우선 십자가가 우리의 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신학적 전통에 의해서 이다. 첫째로 바울적 전통으로부터 기인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라고 말한다(고전1:24). 곧 고린도 사람들의 모든 욕망과 시기와 질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육욕의 삶을 근절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의 도구가 바로 십자가였던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로 떠올랐던 것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때문이었다.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이 지닐 수 있는 위험성, 즉 영웅주의와 허영이 깃든 승리주의가 지니고 있는 구원 없는 구호에 대항하여 루터는 오직 진정한 믿음의 상징인 십자가의 삶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재천명한다. 마지막 셋째로 십자가와 관련된 신학적 전통은 18/19세기 이래로 영국 복음주의 전통으로부터 기인하였다. 존 웨슬리이래의 부흥운동과 십자가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서로 혼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성령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기독교의 지난세기의 이슈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전망은 한 동안 계속되어 질 것이다. 오랫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힘 혹은 능력으로서 단지 예수의 ‘에이전트’(agent) 불과 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래 성령은 하나님으로 인정되었으나 존 웨슬리 이후에야 비로써 조직적이면서도 집단적으로 사람들에게 체험되는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지난세기의 오순절 운동은 더욱 성령에 대한체험을 더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의 성령에 대한 각 이해를 따라 사람들의 신앙과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했다.
예컨대 존 웨슬리의 성령은 구원의 의미로 이해되어졌으나, 웨슬리의 뒤를 이었던 피니의 성령은 각 개인에게 성화를 가능케 하는 영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토리 대에는 성령은 오직 사역과 복음전도를 위한 영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성령을 이해하는 각 시대의 태도에 따라 성령은 제한적으로 수용되어 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개인의 구원의 영으로서 성령을 강조하는 신앙에는 자칫 성결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역할이 무시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결의 영 만을 강조하는 신학 안에서는 개인의 성결이 강조된 나머지 전적 하나님의 칭의로 구원 받음의 신앙은 손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성령을 오직 복음전도만을 유용하게 하는 도구로 생각하면 도덕성을 상실한 영웅주의와 승리주의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더욱 불행한 사태는 성령을 이데오르기화 해서 세계정신의 다른 기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바꾸어 우상을 만드는 일이 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몇 가지의 결론을 얻게 된다. 우선 우리가 얻는 깨달음은 십자가 없는 성령을 외침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아는 일이다. 또한 성령 없는 십자가가 얼마나 율법적이며, 우리들로부터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가는 일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우선 “십자가 없는 성령”을 외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십자가 없이 오직 성령을 외치는 일은 왜곡된 성령을 소지하는 일이다. 곧 십자가의 진지한 자기포기와 희생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 없이는 예수님의 온전한 뜻을 전하시기를 원하는 성령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오직 성령주의자는 열광적 신비주의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루터가 그토록 경계하였던 영광의 복음만을 외치게 된다. 그리고 오직 돌로 떡을 만들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자신의 발을 붙들어 줄 것이라는 이상한 맹신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온 천하를 다 정복한대도 자신의 속에 스며 나오는 만용이 곧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이라는 깨달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든 카리스마 영성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왜곡은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 영웅주의와 자기중심적 지배욕, 그리고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기적들의 진행, 곧 그리스도의 표적과 기적을 마술로 만드는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성령 없는 십자가는 어떤가!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 없는 골고다의 죽음을 말한다.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들은 현재 역사하시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를 부인하는데서부터 성령 그 자체를 생명의 영으로 보지 않고 단지 관념적으로만 생각함으로서 기독교를 죽은 종교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만을 외치며 율법주의자들로 전락한 깡마른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성령을 단지 종교적 정치적 이데오르기로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령에 대한 모독은 다양하기만 하다.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들은 오늘날 성령께서 이 시대를 향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자신의 신학과 전통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리고 끝없는 율법적인 요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하리라는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율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모든 미래의 희망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빼앗아가고 있다. 진취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감동이 전혀 없는 메마른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므로 대안은 십자가와 성령의 상호적인 적용과 균형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가 있는 진지하고 참다운 희생과 겸손과 순종의 신앙위에 희망과 비젼, 그리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운동력과 생명이 곧 우리들의 목표이다. 때문에 정상적인 목회, 그리고 정상적인 참다운 신앙은 십자가와 성령의 강조가 균형이 잡혀서 선포되는 그 곳에 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미래 역시, 십자가와 성령이 우리 신앙에 함께 있으며, 그리고 균형 있는 삶으로 적용되어지는 그런 교회와 우리들의 신앙의 성숙으로 영글어가는 그런 미래이다.
세부적으로 언급하자면, 우선 십자가가 우리의 주제로 떠오르게 된 것은 적어도 세 가지 신학적 전통에 의해서 이다. 첫째로 바울적 전통으로부터 기인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이자 능력이라고 말한다(고전1:24). 곧 고린도 사람들의 모든 욕망과 시기와 질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육욕의 삶을 근절시키는 하나님의 지혜의 도구가 바로 십자가였던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가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로 떠올랐던 것은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 때문이었다. 가톨릭의 영광의 신학이 지닐 수 있는 위험성, 즉 영웅주의와 허영이 깃든 승리주의가 지니고 있는 구원 없는 구호에 대항하여 루터는 오직 진정한 믿음의 상징인 십자가의 삶 없이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바울의 주장을 재천명한다. 마지막 셋째로 십자가와 관련된 신학적 전통은 18/19세기 이래로 영국 복음주의 전통으로부터 기인하였다. 존 웨슬리이래의 부흥운동과 십자가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서로 혼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새로운 성령에 대한 관심은 또 다른 기독교의 지난세기의 이슈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전망은 한 동안 계속되어 질 것이다. 오랫동안 기독교 역사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힘 혹은 능력으로서 단지 예수의 ‘에이전트’(agent) 불과 했다. 니케아 종교회의 이래 성령은 하나님으로 인정되었으나 존 웨슬리 이후에야 비로써 조직적이면서도 집단적으로 사람들에게 체험되는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지난세기의 오순절 운동은 더욱 성령에 대한체험을 더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각 시대마다의 성령에 대한 각 이해를 따라 사람들의 신앙과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했다.
예컨대 존 웨슬리의 성령은 구원의 의미로 이해되어졌으나, 웨슬리의 뒤를 이었던 피니의 성령은 각 개인에게 성화를 가능케 하는 영으로 강조되었다. 그리고 토리 대에는 성령은 오직 사역과 복음전도를 위한 영으로 이해되었다. 때문에 성령을 이해하는 각 시대의 태도에 따라 성령은 제한적으로 수용되어 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개인의 구원의 영으로서 성령을 강조하는 신앙에는 자칫 성결의 영으로서의 성령의 역할이 무시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결의 영 만을 강조하는 신학 안에서는 개인의 성결이 강조된 나머지 전적 하나님의 칭의로 구원 받음의 신앙은 손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성령을 오직 복음전도만을 유용하게 하는 도구로 생각하면 도덕성을 상실한 영웅주의와 승리주의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더욱 불행한 사태는 성령을 이데오르기화 해서 세계정신의 다른 기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바꾸어 우상을 만드는 일이 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와 성령이라는 주제를 생각하면서 몇 가지의 결론을 얻게 된다. 우선 우리가 얻는 깨달음은 십자가 없는 성령을 외침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 아는 일이다. 또한 성령 없는 십자가가 얼마나 율법적이며, 우리들로부터 미래의 희망을 빼앗아 가는 일인지를 깨닫는 일이다.
우선 “십자가 없는 성령”을 외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십자가 없이 오직 성령을 외치는 일은 왜곡된 성령을 소지하는 일이다. 곧 십자가의 진지한 자기포기와 희생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 없이는 예수님의 온전한 뜻을 전하시기를 원하는 성령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없다면 오직 성령주의자는 열광적 신비주의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루터가 그토록 경계하였던 영광의 복음만을 외치게 된다. 그리고 오직 돌로 떡을 만들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천사들이 자신의 발을 붙들어 줄 것이라는 이상한 맹신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온 천하를 다 정복한대도 자신의 속에 스며 나오는 만용이 곧 마귀에게 사로잡힌 것이라는 깨달음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든 카리스마 영성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왜곡은 바로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 영웅주의와 자기중심적 지배욕, 그리고 진정한 의미를 상실한 기적들의 진행, 곧 그리스도의 표적과 기적을 마술로 만드는 행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성령 없는 십자가는 어떤가! 그것은 한마디로 부활 없는 골고다의 죽음을 말한다.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들은 현재 역사하시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은연중에 부인하고 있다. 성령의 은사를 부인하는데서부터 성령 그 자체를 생명의 영으로 보지 않고 단지 관념적으로만 생각함으로서 기독교를 죽은 종교로 만들고 있다. 그것은 십자가만을 외치며 율법주의자들로 전락한 깡마른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성령을 단지 종교적 정치적 이데오르기로 해석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령에 대한 모독은 다양하기만 하다. 오늘날 전통적인 교회들은 오늘날 성령께서 이 시대를 향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자신의 신학과 전통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리고 끝없는 율법적인 요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케하리라는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율법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모든 미래의 희망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빼앗아가고 있다. 진취적이고 생명력이 넘치는 감동이 전혀 없는 메마른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므로 대안은 십자가와 성령의 상호적인 적용과 균형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가 있는 진지하고 참다운 희생과 겸손과 순종의 신앙위에 희망과 비젼, 그리고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운동력과 생명이 곧 우리들의 목표이다. 때문에 정상적인 목회, 그리고 정상적인 참다운 신앙은 십자가와 성령의 강조가 균형이 잡혀서 선포되는 그 곳에 있다. 우리가 참으로 바라고 기대하는 미래 역시, 십자가와 성령이 우리 신앙에 함께 있으며, 그리고 균형 있는 삶으로 적용되어지는 그런 교회와 우리들의 신앙의 성숙으로 영글어가는 그런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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