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 서광교회(담임 김칠곤 목사)는 지난 27일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완전통제구역’에서 태어나 정치범수용소 출생자로는 최초로 탈북에 성공했던 신동혁(27)씨를 강사로 “북한 수용소에 관한 실상”이란 주제로 특별 세미나를 개최했다.

신동혁 씨는 인권이란 말조차 허용되지 않는 참담한 현실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한마디로 '지옥'이라 표현했고 북한 중에서도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는 사회인 수용소의 참상을 세상에 낱낱히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는 6곳 정치범은 20만 명에 달한다.

신 씨는 수용소의 참상과 관련 “지금 이 순간도 북한의 수용소에는 수만명이 고통 받고 있다고 한 끼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고 풀나무 뿌리, 진흙, 쥐, 곤충 등으로 연명하고 있다”며 “공개되는 무자비한 고문과 매질 가운데 여성들은 종종 낙태가 강요되고 태어나는 어린이에게도 어린 시절이란 없다”고 전했다.

그는 “수감자들은 지능과 감정이 없는 짐승으로 취급받고 있다”며 “우리가 북한 수용소의 학대행위에 맞서야 한다. 수감자들이 더 이상 침묵 속에 죽어가지 않도록 인간성을 말살하는 폭력에 항의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우리가 대변해야 한다”고 국제여론 조성을 촉구했다.

신 씨는“수감자들이 더 이상 침묵 속에 죽어가서는 안 된다”며 인간이 견딜 수 없는 수많은 고문이 자행되고, 부모의 공개처형 장면까지 목도해야만 하는 수용소의 반인륜적 행위에 국제사회가 항의할 것을 역설했다.

신 씨는 수용소 안에서 밀알 5알을 훔쳐 먹었다고 모진 매와 벌을 받아 숨진 아이, 옷의 구멍을 군복 천으로 기워 입었다고 공개비난과 집단 폭행을 받은 사건, 365일 강냉이 밥과 소금에 절인 배추 조금을 먹어 다른 음식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일화 등 수용소 내 인권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신씨는 "탈북경위에 대해 외부 세계로 부터 온 수감자에게 세상 밖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북한 내부 사회의 의식개혁을 위한 인권과 민주화를 실어나르는 다각도의 접근과 노력이 필요함을 드러냈다.

▲서광교회 김칠곤 목사 ⓒ김브라이언 기자

이날 설교를 전한 김칠곤 목사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사61:1)을 본문으로 “북한의 모든 김일성 우상이 무너지고 평양에 복음이 회복되는 날이 돌아 올 것”이라며 “백성의 눈물과 고통을 거둘 수 있도록 북한 공산주의 붕괴를 위해 기도의 불이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하는 강의 요약

나는 2005년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한 탈북자로 정치범 수용소 가운데서도 지도원들이 가장 악랄하다는 1982년 평안남도 개천시 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났다. 그는 6·25전쟁 당시 아버지의 형제 두 명이 월남했다는 이유로 수용소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탈출하기 전까지 한 번도 수용소 외부 세상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평안도 개천에 위치한 개천관리소는 수용인들에게 어떠한 자유도 허락되지 않으며 거주 이전의 자유나 결혼의 자유는 들어볼 수도 없었다. 김일성 김정일이란 말조차도 모르고 수용소에서 태어나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북한 내부에서도 격리 된 특수구역이다.

1996년 11월 탈출을 시도하다 어머니와 형이 공개 처형됐으며, 가족들의 처형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14세였던 신 씨는 이 사건으로 불고문을 받아 아직도 등에 흉직한 화상의 상처가 있고, 신 씨의 아버지는 고문을 받아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됐다.

수용소 내 결혼은 표창결혼으로 특정 우수 노동 수감자에게는 김일성이나 김정일 기념일 등 북한 경축일에 맞춰 무작위로 짝을 맺어주었다. 그러나 신혼여행이나 쉬는 날은 기대할 수 없고 동일하게 작업하되 5일 동안만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 그러나 부부가 같은 집에 살 수는 없고 남자는 결혼 5일 후 다시 다른 작업장에 배치되게 된다. 여자는 출산할 때 동안 일을 하지 않으면 산후 조리 할 음식조차 먹을 수 없게 돼 출산직전까지 일하는 경우가 대다수 이다

6살 때부터 노동에 필요한 매우 간단한 한글, 산수 교육만을 받고 작업에 투입됐다. 봄에 쥐를 먹으면 1년을 버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쥐는 귀한 보양음식이었다. 때론 보위부 지도원들은 간혹 털 채로 날 쥐를 생으로 먹게했지만 그것도 마다할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

6-7세 어린아이들은 10명은 10리 거리의 깊은 지하에서부터 2톤의 석탄을 밀고 나와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을 헛딛거나 수레에 다치면 불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옥의 삶이라고 표현했다. 매일 다른 사람을 비판해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감시해야 한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선생이라고 부르는 보위부 간수가 수시로 학생들 주머니를 검사했는데 어느 날 한 여자아이 주머니에서 밀알 다섯 알이 나왔다. 이것으로 인해 아침부터 점심까지 머리를 맞은 여자아이는 결국 나가떨어졌고, 머리 이곳저곳에 피가 뭉친 혹이 올라와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오직 공포만이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매 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