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제와 관련해서 이 주제와 관련된 신학자들의 견해들을 우선 파악해보려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해서 예수자신의 자기이해를 살펴보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지닌 성질과 구도를 설명해 보려 한다. 그리고 끝으로 이 주제가 우리들의 신앙에 어떤 의미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는지를 검토할 것이다.
현대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문화지상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구 베를린 학파로부터 출발한다. 베를린 학파를 대표하고 있던 리츨(Ritschl)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개념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당시에 있었던 사회복음주의의 영향아래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사위였던 바이스(J. Weiss)는 하나님의 나라를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미래에 다가올 것으로 사탄의 나라에 대항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미래를 강조했던 슈바이처(A. Schweizer)는 그의 사상적 계승자였다.
그러나 영국의 다드(C. H. Dodd)는 정반대의 입장을 폈다. 예수의 마12장 28절의 언급을 따라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왔음("at hand", "has come")으로 해석했다. 그 증거로 그는 사탄의 나라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통해 부셔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만을 강조한 점은 아직 오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제외시키고 만다. 때문에 현재는 다가올 완전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취적인(proleptic) 개념으로 이해되어야만 했다(R.H. Fuller). 래드(G.E. Ladd)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완성되었으며 또한 역사적 마지막까지 성취될 것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이해하는데 깊은 이해를 더해 준다.
주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에 언급된 것은 다니엘 7장 13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 다니엘서의 언급은 제 1에녹(Enoch) 비유서와 제 4에즈라(Ezra), 그리고 쿰란문서에 간접적인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이 용어를 복음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The kingdom of God은 마(5);막(14);눅(32);요(2)번, The Kingdom of Heaven은 마(32), 그리고 The Kingdom은 마(13);눅(7);요(3)번에 이른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용법을 사용할 때 장소적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혹은 통치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또한 자신을 지칭하는 인자의 사역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가르쳐 인자라고 한 언급(요3:13;마16:13)은 다니엘 7장의 인자 개념과 관련 있으며, 이 개념은 사도 바울의 다메섹 경험을 통해 하늘에서부터 구름을 타고 영광 가운데 내려오는 자 예수 그가 곧 세상을 다스릴 메시야 즉, 인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자/ 올라간 자(요3:13;6:38)자가 곧 예수 자신임을 증거함을 통해 그는 잠언30장 1-4절의 “이티엘”("Ithiel"), 즉 사람의 아들, 혹은 그 전능자의 아들임을 또 한번 확인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나”(ego eimi:마14:27;요8:24;28))라고 언급한다. 이 말은 “야외”(Yahwe) 하나님의 자기 표현으로서(사43:10;52:6), 모세에게 밝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Eheyeh- Asher- Eheyeh)의 본래 의미와 일치하는 말로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자기증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한 하나님 자신임을 증거 한다(요8:40;56).
이제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증거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자신이 이 땅에서 왕처럼 행세하시고 행동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그러한 삶은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의 인식에 큰 자존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새로운 신앙적인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다(이 점에 대해 뒷부분에 언급할 것임).
예수님 자신의 신성에 대한 자기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주제는 그 현재성에 중요한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자”에 대한 유대적 개념이 곧 “심판”과 “개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 현재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는 마귀의 나라에 대한 심판과 불의에 대한 개입을 전제한다.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구원과 더불어 마귀에 대한 심판을 자신의 사명으로 간주한다(히2:14;1요3:8). 이러한 사명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1:9)라고 하는 “전쟁하는 여호와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의 사명을 띈 분임을 재확인한다.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인 예수님은 곧 하늘의 이변을 몰고 오는 분이시다(계12:1). 그의 탄생은 하늘의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어둠에 대한 빛의 개입과 어둠의 천사들에 대한 빛의 군대들의 심판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는 이제 사탄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며(마4:10), 더 이상 그가 세상임금으로서의 권세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요16:11).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함으로써 사탄의 나라를 심판하며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눅10:17;19).
예수님의 수난을 통한 부활 이후 성령은 예수의 “대리자”(The Agent)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몰고 오는 또 다른 “보혜사”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사명을 충족시키시는 분이며(요16:7),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몰고 들어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정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좌정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을 통해 완성되며, 또한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주제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의미를 주는 것일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며 결론지으려 한다. 즉, 하나는 예수님의 자기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믿음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그 현재성 안에 팽창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의 확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일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왕임을 자가증거하고 있는 예수의 인식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미리 앞당겨 현재화하고 있다. 즉 그는 왕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처럼 명령하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 나라의 우리들의 위치를 이 땅에 믿음으로 땅겨와 현재화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인식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일대 믿음의 대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요구(눅9:13)이기도 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우리의 외향세계와 내면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주권적 통치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즉, 성령은 그 양면세계를 구체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다. 그는 인간의 죄악의 틀로 규정된 뿌리들(sin, quilty, unforgiveness, shy)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내면에 확장한다. 그리고 원죄(original sin)와 우상숭배에 따른 죄, 조상의 망령된 행실의 죄와 문화 전통을 통한 모든 등등의 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나, 가정, 그리고 교회를 자신의 완성해 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로 목표 삼는 것이다.
현대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문화지상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구 베를린 학파로부터 출발한다. 베를린 학파를 대표하고 있던 리츨(Ritschl)은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개인적이고 정신적인 개념으로 이해함과 동시에 당시에 있었던 사회복음주의의 영향아래 해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사위였던 바이스(J. Weiss)는 하나님의 나라를 묵시적이며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미래에 다가올 것으로 사탄의 나라에 대항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미래를 강조했던 슈바이처(A. Schweizer)는 그의 사상적 계승자였다.
그러나 영국의 다드(C. H. Dodd)는 정반대의 입장을 폈다. 예수의 마12장 28절의 언급을 따라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왔음("at hand", "has come")으로 해석했다. 그 증거로 그는 사탄의 나라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을 통해 부셔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만을 강조한 점은 아직 오지 않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의 성취를 제외시키고 만다. 때문에 현재는 다가올 완전한 미래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선취적인(proleptic) 개념으로 이해되어야만 했다(R.H. Fuller). 래드(G.E. Ladd)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완성되었으며 또한 역사적 마지막까지 성취될 것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이해하는데 깊은 이해를 더해 준다.
주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약에 언급된 것은 다니엘 7장 13절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 다니엘서의 언급은 제 1에녹(Enoch) 비유서와 제 4에즈라(Ezra), 그리고 쿰란문서에 간접적인 영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이 용어를 복음서에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The kingdom of God은 마(5);막(14);눅(32);요(2)번, The Kingdom of Heaven은 마(32), 그리고 The Kingdom은 마(13);눅(7);요(3)번에 이른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용법을 사용할 때 장소적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혹은 통치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또한 자신을 지칭하는 인자의 사역과 관련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가르쳐 인자라고 한 언급(요3:13;마16:13)은 다니엘 7장의 인자 개념과 관련 있으며, 이 개념은 사도 바울의 다메섹 경험을 통해 하늘에서부터 구름을 타고 영광 가운데 내려오는 자 예수 그가 곧 세상을 다스릴 메시야 즉, 인자임을 확인하고 있다.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자/ 올라간 자(요3:13;6:38)자가 곧 예수 자신임을 증거함을 통해 그는 잠언30장 1-4절의 “이티엘”("Ithiel"), 즉 사람의 아들, 혹은 그 전능자의 아들임을 또 한번 확인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나”(ego eimi:마14:27;요8:24;28))라고 언급한다. 이 말은 “야외”(Yahwe) 하나님의 자기 표현으로서(사43:10;52:6), 모세에게 밝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Eheyeh- Asher- Eheyeh)의 본래 의미와 일치하는 말로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자기증거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약속한 하나님 자신임을 증거 한다(요8:40;56).
이제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내가 곧 하나님이다’라는 예수님의 자기증거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또한 자신이 이 땅에서 왕처럼 행세하시고 행동하셨던 것이다. 예수의 그러한 삶은 신앙인으로서의 우리들의 인식에 큰 자존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새로운 신앙적인 시각을 제시해 주고 있다(이 점에 대해 뒷부분에 언급할 것임).
예수님 자신의 신성에 대한 자기 인식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주제는 그 현재성에 중요한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자”에 대한 유대적 개념이 곧 “심판”과 “개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 현재 임재한 하나님의 나라는 마귀의 나라에 대한 심판과 불의에 대한 개입을 전제한다. 때문에 예수님은 영원구원과 더불어 마귀에 대한 심판을 자신의 사명으로 간주한다(히2:14;1요3:8). 이러한 사명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1:9)라고 하는 “전쟁하는 여호와의 이름”, 만군의 여호와의 사명을 띈 분임을 재확인한다.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인 예수님은 곧 하늘의 이변을 몰고 오는 분이시다(계12:1). 그의 탄생은 하늘의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어둠에 대한 빛의 개입과 어둠의 천사들에 대한 빛의 군대들의 심판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는 이제 사탄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며(마4:10), 더 이상 그가 세상임금으로서의 권세를 가지지 못하게 한다(요16:11). 그리고 그는 제자들에게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함으로써 사탄의 나라를 심판하며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눅10:17;19).
예수님의 수난을 통한 부활 이후 성령은 예수의 “대리자”(The Agent)로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몰고 오는 또 다른 “보혜사”였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남은 사명을 충족시키시는 분이며(요16:7),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몰고 들어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우리 자신의 내부와 외부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정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안에 좌정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을 통해 완성되며, 또한 그 절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주제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신앙적 의미를 주는 것일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며 결론지으려 한다. 즉, 하나는 예수님의 자기인식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믿음의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성과 그 현재성 안에 팽창하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의 확장을 다시 한번 요약하는 일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의 왕임을 자가증거하고 있는 예수의 인식은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미리 앞당겨 현재화하고 있다. 즉 그는 왕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처럼 명령하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 나라의 우리들의 위치를 이 땅에 믿음으로 땅겨와 현재화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인식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일대 믿음의 대변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요구(눅9:13)이기도 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은 우리의 외향세계와 내면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주권적 통치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즉, 성령은 그 양면세계를 구체적으로 통치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다. 그는 인간의 죄악의 틀로 규정된 뿌리들(sin, quilty, unforgiveness, shy)을 제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내면에 확장한다. 그리고 원죄(original sin)와 우상숭배에 따른 죄, 조상의 망령된 행실의 죄와 문화 전통을 통한 모든 등등의 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나라로서 나, 가정, 그리고 교회를 자신의 완성해 나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로 목표 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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