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의 목표는 무엇일까요? 16절을 보십시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의 목표는 한가지였습니다. 곧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꿈은 자기의 사랑하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교사가 나오고, 목사가 나와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제물로까지 바쳐지도록 하게 하는 것이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소위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도 할 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외에는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척하고 오직 이방인을 위하여 나를 부르신 그것만을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도 사도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은 반지성주의나 비이성주의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지성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와 상식과 합리성의 세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결혼도 중요하지 않았고 어떤 위치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수도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갇힌 몸이 되어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렇게 많은 매를 맞았어도 찬송을 불렀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지성이 뛰어나고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보면 거세된 사람이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사도바울은 복음을 알고 난 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살던 지역도 민족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소리입니다.
복음의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곳에만 찾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의 싸움은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기득권 싸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만들어 놓은 곳에 가서 앉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그런 기득권과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개척 정신을 갖습니다. 남이 전도하지 않는 곳, 남이 만지지 않은 곳, 처녀지를 향해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제가 새교회 목회를 하라는 초청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몇 달 동안 고민한 것은 가까운 곳에 많은 한인 교회가 있는데 왜 여기에 새교회가 있어야 되는 가입니다. 잘못하면 경쟁하기 쉬워집니다. 차라리 선교를 하러 나가거나 아님 기존교회에 가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섬기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고민했습니다. 몇 달 만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의도했던 교회,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었던 교회가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능한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을 할 때 제 가슴에 뜨거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교회라면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서는 사도바울은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지의 세계로 가야하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2~2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이곳에서 두 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먼저 2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바울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서바나 이었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그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서바나는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전설적인 그 곳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고 이것이 로마서입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로마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로마는 그 당시 전 세계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로마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 진짜 이유는 서바나로 가기 전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그 정도로 일을 했다면 기득권에 안주할 수도 있습니다. 원로목사가 되어 자기가 고생한 것만큼 여생을 편안히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거절하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 서바나에 관심이 있고 그곳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한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을 입양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풍토병도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전도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의 영혼이 있다면 그곳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28절을 보면 복음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고한 대가로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있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있고 한 나라가 있다면, 한 민족이 있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30절 이후에 세 가지 기도부탁을 합니다. 첫째는 전도하고자 하는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탁은 이방인들이 바울에게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으로 인해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로마에 가는 여정을 인도해 주실 것과 장차 서바나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고 로마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은 땅 끝에 한 영혼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그 곳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사도바울의 이 뜨거운 심장이 여러분의 혈관 속에서 똑같이 맥박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전도 종족을 보게 하십니다.
언젠가 우리도 갈 것입니다. 한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콩나물 신자와 콩나무 신자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콩나물은 콩이 머리와 꼬리로만 되어 있는 한 알의 미개발된 식물의 모습입니다. 마치 올챙이 같은 모양이지요.. 이런 콩나물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걸 기르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햇빛을 차단한 다음에 물을 줄줄 흘러넘치도록 주면 희멀겋게 쑥쑥 자라는 것이 콩나물입니다. 즉 일체의 자극을 피하면서 목마를 겨를도 없이 물을 퍼주어야 실뿌리가 생기지 않고 줄기가 쑥쑥 자라서 먹기 좋은 콩나물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콩나물 신자 기르는데 전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콩은 원래 가뭄을 잘 이기는 농작물입니다. 그래서 마른 흙에 심습니다. 마른 흙속에 묻어 놓아도 어떻게든지 수분을 찾아가고 수분을 섭취해서 자라 갑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열배, 백배의 수확을 맺습니다. 이것이 콩나무입니다. 콩나물 신자는 사단의 국거리에 알맞습니다. 그러나 콩나무 신자는 하나님의 곳간을 채우는 신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의 모습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신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의 목표는 한가지였습니다. 곧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꿈은 자기의 사랑하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교사가 나오고, 목사가 나와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구원의 축제가 이루어지는 제물로까지 바쳐지도록 하게 하는 것이 바울의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소위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17,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사도바울은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절제 하겠다는 것입니다. 말할 줄 몰라서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도 할 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 외에는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척하고 오직 이방인을 위하여 나를 부르신 그것만을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에도 사도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은 반지성주의나 비이성주의적인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바울은 지성의 세계와 학문의 세계와 상식과 합리성의 세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결혼도 중요하지 않았고 어떤 위치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수도 되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갇힌 몸이 되어도 아무런 갈등이 없었습니다.
감옥에서 그렇게 많은 매를 맞았어도 찬송을 불렀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지성이 뛰어나고 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어떻게 보면 거세된 사람이요 편협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면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보십시오.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힘 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사도바울은 복음을 알고 난 후에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자기가 살던 지역도 민족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서는 전도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소리입니다.
복음의 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곳에만 찾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의 싸움은 예수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기득권 싸움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만들어 놓은 곳에 가서 앉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그런 기득권과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며 개척 정신을 갖습니다. 남이 전도하지 않는 곳, 남이 만지지 않은 곳, 처녀지를 향해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제가 새교회 목회를 하라는 초청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몇 달 동안 고민한 것은 가까운 곳에 많은 한인 교회가 있는데 왜 여기에 새교회가 있어야 되는 가입니다. 잘못하면 경쟁하기 쉬워집니다. 차라리 선교를 하러 나가거나 아님 기존교회에 가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섬기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고민했습니다. 몇 달 만에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신 것은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이 의도했던 교회,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었던 교회가2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능한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생각을 할 때 제 가슴에 뜨거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교회라면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전도한 곳에서는 사도바울은 전도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곳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미지의 세계로 가야하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안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것을 거부합니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22~2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교제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을 바람이라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이곳에서 두 절을 주의하여 보십시오. 먼저 2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바울의 관심은 로마가 아니라 서바나 이었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입니다. 그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서바나는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전설적인 그 곳에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주기 위하여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고 이것이 로마서입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이유는 로마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로마는 그 당시 전 세계의 수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바울은 로마의 유혹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 진짜 이유는 서바나로 가기 전에 로마에 있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하여 사도바울은 1차, 2차, 3차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그 정도로 일을 했다면 기득권에 안주할 수도 있습니다. 원로목사가 되어 자기가 고생한 것만큼 여생을 편안히 지내고 싶어 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거절하고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합니다. 지구의 끝이고 죽음의 땅이라고 하는 서바나에 관심이 있고 그곳에 복음을 전해야 하는 한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서 죽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 번도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을 입양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풍토병도 있습니다. 또한 그들을 전도하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구원받아야 할 한 사람의 영혼이 있다면 그곳에 가겠다고 말합니다.
28절을 보면 복음은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수고한 대가로 열매를 따먹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개척정신입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 위에 있지 않습니다. 새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있고 한 나라가 있다면, 한 민족이 있다면 죽음을 무릅쓰고 거기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30절 이후에 세 가지 기도부탁을 합니다. 첫째는 전도하고자 하는 그 지역의 사람들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탁은 이방인들이 바울에게 헌금을 했는데 그 헌금으로 인해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로마에 가는 여정을 인도해 주실 것과 장차 서바나까지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고 로마서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은 땅 끝에 한 영혼이 있다면 포기하지 않고 그 곳까지 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사도바울의 이 뜨거운 심장이 여러분의 혈관 속에서 똑같이 맥박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미전도 종족을 보게 하십니다.
언젠가 우리도 갈 것입니다. 한 영혼이 있다면 우리는 그곳까지 가야 합니다.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콩나물 신자와 콩나무 신자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콩나물은 콩이 머리와 꼬리로만 되어 있는 한 알의 미개발된 식물의 모습입니다. 마치 올챙이 같은 모양이지요.. 이런 콩나물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걸 기르는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고 햇빛을 차단한 다음에 물을 줄줄 흘러넘치도록 주면 희멀겋게 쑥쑥 자라는 것이 콩나물입니다. 즉 일체의 자극을 피하면서 목마를 겨를도 없이 물을 퍼주어야 실뿌리가 생기지 않고 줄기가 쑥쑥 자라서 먹기 좋은 콩나물이 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콩나물 신자 기르는데 전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콩은 원래 가뭄을 잘 이기는 농작물입니다. 그래서 마른 흙에 심습니다. 마른 흙속에 묻어 놓아도 어떻게든지 수분을 찾아가고 수분을 섭취해서 자라 갑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열배, 백배의 수확을 맺습니다. 이것이 콩나무입니다. 콩나물 신자는 사단의 국거리에 알맞습니다. 그러나 콩나무 신자는 하나님의 곳간을 채우는 신자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도의 모습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라고 하나님께서 여기에 두신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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