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신앙이라는 것을 오해하고 있었다. 신앙이란 어지러운 세상에서 오직 평온함을 얻는 것, 요란한 소요에서 벗어나 고요한 정적을 가지는 것만으로 이해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신앙 생활에는 다분히 그러한 요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마주치는 문제가 힘에 벅차서 그냥 조용한 곳으로 도피해 가는 퇴영(退營)의 상태가 결코 신앙은 아니어야 한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안심, 인명, 복락의 종교는 아니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젊은 시절 꽤 오래동안 고민했었던 적도 있다. 이 세상은 온통 죄악의 물결인데 교회는 이 물결에서 건짐을 받은 신성한 수재민 대피소란 말인가? 성숙 이원론적 사고 위에 기초를 둔 몰사회적이고 소극적인 콤플렉스의 소유자들을 모아놓고 ‘트랭퀼라이저’(진정제와는 개념이 다른 정온제)를 투여하는 장소가 교회란 말인가?
신앙은 오히려 안정에서 불안으로, 무감각에서 의식화의 세계로, 몽롱한 상태에서 각성한 상태로, 문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문제 의식이 민감한 상태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상태로 전진하는 것이 참 신앙이 아닐까? 그래서 신앙은 개척되어진 환경에서 주어진 업무에 보상만을 바라는 보수(保守)가 아니라, 미개척의 들판으로 나아가는 개척(開拓)인 것이다. 즉 신앙인은 후방의 안전지대에서 무사한 평안을 구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방의 최일선에서 모험을 무릅쓰고 새 희망이 있음을 알려주는 변방(邊防)주의자들이다.
교회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아가고자 하는 진행의 뒤를 따르는 후속 부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앞장서서 나가는 ‘아방가르드’(avant-garde : 기성의 예술 관념이나 형식을 부정하고 혁신적 예술을 주장한 예술 운동으로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일어난 다다이즘,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따위로 통칭)이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히11:1).
우리가 바라고 실천해야 할 신앙은 안정의 상태, 정착의 상태가 아니라 전진의 상태, 진군의 상태이다. 그래서 신앙인은 사상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행동 속에 사는 것이다. 정착자에게는 보수와 무미건조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고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감동의 역사는 없다. 교회란 바로 이런 감동의 역사를 준비하고 실천하는 곳이 될 때 비로소 세상의 이웃들은 교회와 신앙을 갖고 싶어 할 것이다.
한 3개월 동안 새 담임목사를 기다리고 있던 인근지역의 oo교회에 가서 위의 뜻으로 설교를 했다. 새로 부임하는 목회자와 온 성도들이 부디 참다운 신앙의 실천을 이루기를 바라는 뜻에서 나름대로 힘을 다해 메시지를 전했지만, 미진한 마음이 더 많이 든다. 미주 한인교회들의 성도들도 고백하고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여 신앙의 아름다운 증언들이 세상과 이웃에 전해지기를 계속해서 기원해 본다. 왜냐하면 교회와 신앙이 바로 서야 세상과 이웃을 연결할 전도와 선교가 힘을 얻기 때문이다.
박상원 목사_SAM USA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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