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는 새로운 시대적 테마인“카리스마적 영성”이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질문하고 있다. 따라서 카리스마적 영성의 현대적 이해와 해석의 새로운 가능성 및 신학적 균형을 위한 제안들이 탐구되고 있다. 몇 가지 카리스마 영성운동과 관련해 짚어보면, 과거와 현대의 카리스마적 영성은 아직도 체 마무리되지 않은 미래로의 길을 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린 체계로서 계시의 역사성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롭게 조명되고 있으며, 모든 카리스마의 원천으로서 새로운 신학적 인식과 과거 기독교 역사 가운데 역사해 오셨으며, 또한 지금도 신앙인 한 개인, 교회 공동체, 그리고 세계 속에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성령의 역사적 계시성에 대한 과거의 비판적 입장, 즉 은사종말론적 사상등과 같은 반성령주의적 태도로부터 새로운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를 수용함과, 카리스마운동의 시작 그리고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과 운동의 진척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 모색될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과거의 카리스마적 영성사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과거의 역사적 신학적 논쟁점에 대한 추적을 통해 위치 파악이 필요로 되는 일이며, 또한 현재의 카리스마 영성운동의 위치 설정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영성적 사건들, 즉 예수의 카리스마적 사역인 악령 추방과 “엑소시아”(exocia)의 문제는 현대 카리스마운동의 입장에서는 항상 원전과 전형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제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즉, 초대교회는 구원이라는 독특한 과제와 더불어 상관적 관계에서 구원을 위해 악마를 추방해야 한다는 독특한 상호보완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카리스마적 사역이 현대 카리스마운동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는 근거로서 출발되고 있기에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의 카리스마적 영성에 대한 언급은 현대 영성학의 관심사에 따라, 바울의 용어, “아스케인”(άskein)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적이며 수덕적인 경향,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일치 사상”(Unio cum Christo)의 전통, 그리고 바울의 신학적 개념인 “영을 좇아서”와 표적과 기사로 복을을 전했다는(롬 15:18) 바울의 말씀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의 성격을 풀어주는 실마리로 작용함을 이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사역을 통해 카리스마적 은사들의 흔적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는 일은, “은사종료사상”의 잘못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필요 되어지는 연구 부분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중세의 성례전은 카리스마의 또 다른 자기표현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현대 카리스마적 전통과 개신교적 전통에서의 성례전 의식의 부재를 위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터와, 칼빈과 청교도들의 성령의 체험에 의한 신비적 합일은(Unio-mystica)의 구조는 그리스도와의 일치(Unio cum Christo)라고 하는 청교도의 연합사상으로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사실은, 청교도의 사상과 신비적 전통을 받았던 이후에 발생할 모든 카리스마적 전통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존 웨슬리와 제 1, 2차 대각성운동을 둘러싼 인물들과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의 신학의 성격과 구조를 밝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과 관련해서 언급된 고전적 오순절주의, 초교파 카리스마운동, 그리고 신카리스마운동으로 지목되는 제 3의 물결운동은 아직 빈약한 신학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에 큰 신앙운동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주된 관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카리스마운동들이 전통교회가 잊고 있었던 영성과 신학에 관련해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경험들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음이 시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우선 역사적 추적을 통해 크게 현대 카리스마운동을 세 부분으로 나
눌 수 있고, 오순절운동, 초교파 카리스마운동, 그리고 제 3의 운동이 속하는 신카리스마운동의 성격들로 나눌 수 있다.
오순절운동과 현대 카리스마운동의 시대적 파장과 흐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관심을 끌어오는 문제는 역시 성령세례의 문제이며, 성화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일이다. 이는 모든 존 웨슬리전통의 오순절신학과 카리스마적 영성 전통의 이론에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카리스마운동과 연합운동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 문제가 되고 있는 “제 3의 물결”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나라” 신학의 새로운 이해, 그리고 “영적 전쟁”과 관련하여 성령의 역할과 세계로의 복음화 구도들을 위한 전략 등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에 나타나고 있는 한 특징, 성령의 또 다른 활동성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복음주의교회들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 카리스마운동에 있어서 카리스마의 개인적 적용문제, 즉 실천적 적용의 문제와 관련해서, 현대 카리스마운동과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단지 한 개인의 실존에만 정초시키지 않고 있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서 한 인간의 실존은 교회공동체와 전 세계, 즉 복음화 되어야 할 모든 영역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이때 중요한 논리 근거가 되고 신학적인 요점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세상 개입은 곧 “영적 전쟁”으로 비화된다.
그리고 현대 카리스마운동에 있어서 카리스마영성과 삶의 지평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카리스마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한 특별한 위치와 권한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적 특성이자 새로운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과 관심사를 불러일으키는 요점이다. 카리스마주의자들은 믿음을 수단으로, 성령을 “모든 것을 주시는 분”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고백으로부터 “적극적 사고”와 “성공을 마음에 그림”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된다(히11:1). 또 다른 성령의 역할은 현대의 목회적 범위를 통해서도 역시 나타난다. 성령은 내적치유의 영이시고 인간의 모든 영적 문제의 해결자 이시다. 카리스마운동은 성령의 역사를 단지 세계로의 영적 전쟁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은 인간의 내면을 향하여 내적치유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함으로 신학을 정리했다. 아직 과정 중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힌트를 현대 목회에 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 즉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 없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성령의 임재는 곧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접 붙여짐이 되게 하고, 마침내 하나님 자녀로서의 책임, 즉 성화의 삶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성령 없는 그리스도만을 부르짖는 현대교회는 감동 없는 죽은 율법주의로 회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탓을 우리들의 잘못된 역사, 즉 루터와 칼빈의 성령에 대한 깊은 관심과 고려를 멜란히톤의 지성주의와 신조 중심의 후기 스콜라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던 개신교회들의 고착화와, 그리고 신세계의 도래와 함께 과학적 사고의 지성중심의 이성주의 신학으로의 잘못된 전향만을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세움 받는, 말씀의 역사와 이적을 일으키는 참다운 믿음의 신앙으로 회기해야 한다. 이 또한 칼빈이 우리에게 남긴 충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는 성령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진리 없는 감정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령주의자들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아야 하며, 역시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편견을 넘어서 올바른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성령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롭게 조명되고 있으며, 모든 카리스마의 원천으로서 새로운 신학적 인식과 과거 기독교 역사 가운데 역사해 오셨으며, 또한 지금도 신앙인 한 개인, 교회 공동체, 그리고 세계 속에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때문에 성령의 역사적 계시성에 대한 과거의 비판적 입장, 즉 은사종말론적 사상등과 같은 반성령주의적 태도로부터 새로운 성령과 그 사역에 대한 이해를 수용함과, 카리스마운동의 시작 그리고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과 운동의 진척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 모색될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리고 과거의 카리스마적 영성사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운동의 성격을 규명하는 일은 과거의 역사적 신학적 논쟁점에 대한 추적을 통해 위치 파악이 필요로 되는 일이며, 또한 현재의 카리스마 영성운동의 위치 설정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과거의 영성적 사건들, 즉 예수의 카리스마적 사역인 악령 추방과 “엑소시아”(exocia)의 문제는 현대 카리스마운동의 입장에서는 항상 원전과 전형으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제기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즉, 초대교회는 구원이라는 독특한 과제와 더불어 상관적 관계에서 구원을 위해 악마를 추방해야 한다는 독특한 상호보완적 시각을 지니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카리스마적 사역이 현대 카리스마운동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들어 주는 근거로서 출발되고 있기에 언급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바울의 카리스마적 영성에 대한 언급은 현대 영성학의 관심사에 따라, 바울의 용어, “아스케인”(άskein)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적이며 수덕적인 경향,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리스도와 신비적 일치 사상”(Unio cum Christo)의 전통, 그리고 바울의 신학적 개념인 “영을 좇아서”와 표적과 기사로 복을을 전했다는(롬 15:18) 바울의 말씀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의 성격을 풀어주는 실마리로 작용함을 이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사역을 통해 카리스마적 은사들의 흔적들이 여전히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는 일은, “은사종료사상”의 잘못된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필요 되어지는 연구 부분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중세의 성례전은 카리스마의 또 다른 자기표현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현대 카리스마적 전통과 개신교적 전통에서의 성례전 의식의 부재를 위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터와, 칼빈과 청교도들의 성령의 체험에 의한 신비적 합일은(Unio-mystica)의 구조는 그리스도와의 일치(Unio cum Christo)라고 하는 청교도의 연합사상으로으로 발전했다고 하는 사실은, 청교도의 사상과 신비적 전통을 받았던 이후에 발생할 모든 카리스마적 전통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힌트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존 웨슬리와 제 1, 2차 대각성운동을 둘러싼 인물들과 시대적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의 신학의 성격과 구조를 밝히는데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과 관련해서 언급된 고전적 오순절주의, 초교파 카리스마운동, 그리고 신카리스마운동으로 지목되는 제 3의 물결운동은 아직 빈약한 신학적 기반에도 불구하고 현대교회에 큰 신앙운동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주된 관심이 되고 있다. 그리고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카리스마운동들이 전통교회가 잊고 있었던 영성과 신학에 관련해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경험들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을 밝힐 필요가 있음이 시대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우선 역사적 추적을 통해 크게 현대 카리스마운동을 세 부분으로 나
눌 수 있고, 오순절운동, 초교파 카리스마운동, 그리고 제 3의 운동이 속하는 신카리스마운동의 성격들로 나눌 수 있다.
오순절운동과 현대 카리스마운동의 시대적 파장과 흐름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관심을 끌어오는 문제는 역시 성령세례의 문제이며, 성화에 대한 이해를 다루는 일이다. 이는 모든 존 웨슬리전통의 오순절신학과 카리스마적 영성 전통의 이론에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카리스마운동과 연합운동의 특징을 파악하는 일, 문제가 되고 있는 “제 3의 물결”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나라” 신학의 새로운 이해, 그리고 “영적 전쟁”과 관련하여 성령의 역할과 세계로의 복음화 구도들을 위한 전략 등은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에 나타나고 있는 한 특징, 성령의 또 다른 활동성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복음주의교회들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 카리스마운동에 있어서 카리스마의 개인적 적용문제, 즉 실천적 적용의 문제와 관련해서, 현대 카리스마운동과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단지 한 개인의 실존에만 정초시키지 않고 있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서 한 인간의 실존은 교회공동체와 전 세계, 즉 복음화 되어야 할 모든 영역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신학은 이때 중요한 논리 근거가 되고 신학적인 요점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세상 개입은 곧 “영적 전쟁”으로 비화된다.
그리고 현대 카리스마운동에 있어서 카리스마영성과 삶의 지평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하다. 카리스마주의자들은 성령에 대한 특별한 위치와 권한을 부여한다. 그것은 그들의 신학적 특성이자 새로운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과 관심사를 불러일으키는 요점이다. 카리스마주의자들은 믿음을 수단으로, 성령을 “모든 것을 주시는 분”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고백으로부터 “적극적 사고”와 “성공을 마음에 그림”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된다(히11:1). 또 다른 성령의 역할은 현대의 목회적 범위를 통해서도 역시 나타난다. 성령은 내적치유의 영이시고 인간의 모든 영적 문제의 해결자 이시다. 카리스마운동은 성령의 역사를 단지 세계로의 영적 전쟁에만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은 인간의 내면을 향하여 내적치유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함으로 신학을 정리했다. 아직 과정 중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힌트를 현대 목회에 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 카리스마적 영성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임재, 즉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 없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성령의 임재는 곧 교회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로 접 붙여짐이 되게 하고, 마침내 하나님 자녀로서의 책임, 즉 성화의 삶과 영광을 돌리는 삶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성령 없는 그리스도만을 부르짖는 현대교회는 감동 없는 죽은 율법주의로 회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탓을 우리들의 잘못된 역사, 즉 루터와 칼빈의 성령에 대한 깊은 관심과 고려를 멜란히톤의 지성주의와 신조 중심의 후기 스콜라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던 개신교회들의 고착화와, 그리고 신세계의 도래와 함께 과학적 사고의 지성중심의 이성주의 신학으로의 잘못된 전향만을 변명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세움 받는, 말씀의 역사와 이적을 일으키는 참다운 믿음의 신앙으로 회기해야 한다. 이 또한 칼빈이 우리에게 남긴 충고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없는 성령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진리 없는 감정에만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없는 성령주의자들에게도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아야 하며, 역시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편견을 넘어서 올바른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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