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건전한 교회 성장은 단일교회의 확장이 아니라 지교회를 세워 연장적 교회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형교회를 세우기보다는 지역으로 분할하는 것이고, 농촌이나 낙도에 교회를 세우는 일, 교회게 필요한 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통해 우주적 교회의 성장을 도모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자국인의 지도력에 의해 교회가 치리되고 전도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들의 이름을 한국 교회에다 붙여 놓은 일이 없다. 그런데 유독 우리는 왜 그들의 이름도 아닌 한국 이름을 붙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선교 목적은 주님의 날 확장이지 한국을 선전하거나 한국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 교회가 한국인들을 위한 교회라면 이해되지만 현지인 교회라면 그것은 개교회 확장주의에 불과하다.

바울이 보여준 선교의 원리는 철저하게 토착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토착교회는 자국인들이 편하게 와서 그들의 방법대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고, 현지인 지도력을 통해 발전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문지방이 높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교회의 건물, 말씀의 내용, 예배의 분위기 등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아주 낮은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저들을 수용할 문화가 창출되지 못하고 있다. 시장에서 주일 예배를 드린다든지, 공터에서 예배드릴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옛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전용물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형식을 중요시해 예배가 경직된 감이 없지 않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가면 다리 밑에서 주일이면 1,000명이 넘는 걸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고, 러시아의 모스크바 거리에는 그 추운 겨울에도 매주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들이 있다. 그런 예배들은 건물은 없지만 공식적인 예배이다. 이리안자야의 사람들은 벌거벗은 몸으로 건물도 없는 야외에서 주일예배를 드린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이고 예배이지 형식이나 건물 중심이 아닌 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지의 예배는 한국적 전통으로는 안 된다. 그들이 수준에 맞는 교회, 그들만의 예배형식만이 토착교회를 만들 수 있다. 진리는 사수하되 말씀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것을 좋아하고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