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국가의 중대한 문제와 의결 사항을 처리하는데 입장이 곤란할때 사인을 하기 이전에 자주 사용하는 말이 하나가 있는데 그 말은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이다. 이러한 말은 특별히 이민자들이 많이 쓰는 말중에 하나이다. 이에 해당되는 경우들로 상대에게 질문을 던져서는 아니되는 금기 사항들은 “당신의 체류 신분의 상태가 무엇입니까?” “한국에서 뭐하다 오셨습니까?” “결혼은 하셨습니까?”와 같은 물음들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이민자들에게 특별히 민감한 부분이기에 그러한 질문 자체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지난날의 아픔을 밝히고 싶지 아니하는 마음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기 싫어 한인 사회와 동떨어져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대인 기피증’의 병까지 앓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가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들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만나면 피곤하고 조금만 허물을 보여도 그것으로 말을 만들어내어 상처와 실망을 주지만 자신들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들은 나를 항상 좋아하고 반가움으로 기쁨을 주기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갖는 것보다 차라리 말 못하는 짐승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인 아담을 만들고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워 보여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대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들고 그를 아담의 베필로 삼고 그들에게 만물의 모든 짐승과 자연을 다스리게 명한 것으로 볼때 성서에서 하나님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관계형성과 사람과 짐승의 관계형성을 다르게 분리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인 입장에서 올바른 가르침이지만 왜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형성 속에서 “실망과 좌절”로 인해 관계형성이 단절되고 자신들이 기르는 짐승과의 관계형성을 소중하게 여기는지에 대해 한번쯤 스스로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이 용납이 안돼고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을 집단적으로 “비방과 비난”을 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수치감과 굴욕감”을 갖게하는 노리꾼들이고 그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군중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잘못을 찾으려고 하는 노리꾼들의 먹잇감은 항상 “남의 집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들이다.” 쓰레기는 사실상 어느 특정한 사람의 집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쓰레기 통들이 있다. 음식 찌거기를 쓰레기 봉투에 아무리 잘 봉합을 하여 차고의 창고에 있는 큰 쓰레기 통에 둔다 해도 그 쓰레기통에서 나는 악취는 잘사는 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동일할 것이다. 차고에 있는 쓰레기 통에서 악취가 나지 아니하려면 쓰레기를 치우는 차가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쓰레기를 수거할 때이다.
이러한 더러운 쓰레기를 남의 집을 방문할때마다 뒤지고 자신의 집에 있는 쓰레기는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쓰레기는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말하는 것으로 롬마서 3: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말은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있으며 죄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를 각자가 가지고 살면서도 사람들은 남이 가진 쓰레기를 더 문제시 삼은 것은 집단 이기주의 사회 일것이며 자신들의 삶을 밝히기를 싫어하는 이민자들의 사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날의 집단적인 이기주의 사회를 생각나게 하는 것을 성경에서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8장1-1절에 나오는 것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의 중심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그의 대답에 따라 예수님을 어려운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아 온 것은 남녀가 아닌 여자만 예수님께 데려온 것이다.
집단적인 이기주의 마음으로 모인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몸을 굽혀 땅에 두번 무엇인가 글을 쓰고 난 후에 군중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던져라”(요8:7)고 말을 했을때 이 말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온 군중들이 하나씩 떠나간 이유는 자신들 모두가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도 돌을 던지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떠났을때 예수님은 남아 있는 여자에게 말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느니라”고 예수님이 이렇게 군중들과 간음한 여인에게 말을 한 것의 요점은 “모두가 죄를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를 벌하지 말라”가 아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여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남의 쓰레기(허물)를 뒤지고 다니면 다닐수록 사람들의 비방과 비난은 더욱더 거세질 것이며 아름다워야 할 사람들의 관계가 단절되어 신뢰의 회복이 어려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남의 쓰레기 보다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쓰레기(허물)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바라 보아야 할 것이고 남의 허물을 볼때 그것을 드러낸다고 그 사람의 삶이 고쳐질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남의 쓰레기를 뒤집어 놓으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만 주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상대의 허물을 볼때마다 그 허물을 드려내려 하지말고 감싸주고 너그럽게 포용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허물에 대한 “용서는 사람을 순식간에 정화시키고 사랑과 이해의 문을 활짝 열어 준다.” 각 가정의 쓰레기는 시간이 지날때마다 더 많아지는데 그많은 쓰레기들을 각 가정들이 처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쓰레기 차가 와서 각 가정들이 밖으로 내어 놓은 쓰레기 통을 비워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이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허물과 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정결하게 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허물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러한 질문들은 이민자들에게 특별히 민감한 부분이기에 그러한 질문 자체가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지난날의 아픔을 밝히고 싶지 아니하는 마음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들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받기 싫어 한인 사회와 동떨어져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대인 기피증’의 병까지 앓고 있는 사람들도 간혹가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들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만나면 피곤하고 조금만 허물을 보여도 그것으로 말을 만들어내어 상처와 실망을 주지만 자신들이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나 개들은 나를 항상 좋아하고 반가움으로 기쁨을 주기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갖는 것보다 차라리 말 못하는 짐승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하나님이 사람인 아담을 만들고 그가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워 보여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대 하나를 취해 여자를 만들고 그를 아담의 베필로 삼고 그들에게 만물의 모든 짐승과 자연을 다스리게 명한 것으로 볼때 성서에서 하나님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관계형성과 사람과 짐승의 관계형성을 다르게 분리하신 것이다. 이것이 성서적인 입장에서 올바른 가르침이지만 왜 사람들이 사람들과의 관계형성 속에서 “실망과 좌절”로 인해 관계형성이 단절되고 자신들이 기르는 짐승과의 관계형성을 소중하게 여기는지에 대해 한번쯤 스스로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잘못이 용납이 안돼고 누군가가 실수를 하거나 죄를 범하게 되면 그것을 집단적으로 “비방과 비난”을 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수치감과 굴욕감”을 갖게하는 노리꾼들이고 그들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내는 군중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잘못을 찾으려고 하는 노리꾼들의 먹잇감은 항상 “남의 집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들이다.” 쓰레기는 사실상 어느 특정한 사람의 집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가정에 쓰레기 통들이 있다. 음식 찌거기를 쓰레기 봉투에 아무리 잘 봉합을 하여 차고의 창고에 있는 큰 쓰레기 통에 둔다 해도 그 쓰레기통에서 나는 악취는 잘사는 집이나 가난한 집이나 동일할 것이다. 차고에 있는 쓰레기 통에서 악취가 나지 아니하려면 쓰레기를 치우는 차가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쓰레기를 수거할 때이다.
이러한 더러운 쓰레기를 남의 집을 방문할때마다 뒤지고 자신의 집에 있는 쓰레기는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희망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쓰레기는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말하는 것으로 롬마서 3: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말은 모든 사람이 죄를 가지고 있으며 죄가운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죄를 각자가 가지고 살면서도 사람들은 남이 가진 쓰레기를 더 문제시 삼은 것은 집단 이기주의 사회 일것이며 자신들의 삶을 밝히기를 싫어하는 이민자들의 사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오늘날의 집단적인 이기주의 사회를 생각나게 하는 것을 성경에서 비추어 본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8장1-1절에 나오는 것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의 이야기이다. 여기에 나오는 이야기의 중심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그의 대답에 따라 예수님을 어려운 함정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아 온 것은 남녀가 아닌 여자만 예수님께 데려온 것이다.
집단적인 이기주의 마음으로 모인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몸을 굽혀 땅에 두번 무엇인가 글을 쓰고 난 후에 군중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던져라”(요8:7)고 말을 했을때 이 말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온 군중들이 하나씩 떠나간 이유는 자신들 모두가 죄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누구도 돌을 던지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떠났을때 예수님은 남아 있는 여자에게 말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느니라”고 예수님이 이렇게 군중들과 간음한 여인에게 말을 한 것의 요점은 “모두가 죄를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를 벌하지 말라”가 아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 그것을 인정하고 반성하여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핵심이다. 남의 쓰레기(허물)를 뒤지고 다니면 다닐수록 사람들의 비방과 비난은 더욱더 거세질 것이며 아름다워야 할 사람들의 관계가 단절되어 신뢰의 회복이 어려워질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남의 쓰레기 보다는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쓰레기(허물)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바라 보아야 할 것이고 남의 허물을 볼때 그것을 드러낸다고 그 사람의 삶이 고쳐질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남의 쓰레기를 뒤집어 놓으면 오히려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만 주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상대의 허물을 볼때마다 그 허물을 드려내려 하지말고 감싸주고 너그럽게 포용하며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허물에 대한 “용서는 사람을 순식간에 정화시키고 사랑과 이해의 문을 활짝 열어 준다.” 각 가정의 쓰레기는 시간이 지날때마다 더 많아지는데 그많은 쓰레기들을 각 가정들이 처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쓰레기 차가 와서 각 가정들이 밖으로 내어 놓은 쓰레기 통을 비워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이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허물과 죄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정결하게 씻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허물과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에 예수님을 인정하고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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