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국에서 목회 할 때 제가 섬기던 구역의 한 가정에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키도 크고 아주 잘생겼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비실비실 시도 때도 없이 웃는 것입니다. 너무나 안돼서 제가 물어봤더니만 소위 말하는 집단 따돌림과 괴롭힘으로 정신 상태에 이상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부모도 선생님도 감지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울 뿐입니다. 한국선 정말 학교 보내기가 무서운 것 같습니다. 이 왕따현상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은 소위 '왕따'로 따돌림 받는 학생 자신은 물론이요, 그로인한 피해를 받은 그의 가족의 고통과 쓰라림이 이루 형용할 길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학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은 마을에도 있습니다. 직장에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가장 사랑이 넘쳐야할 교회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치유하지 못하면 다음세대 조차도 심성이 비틀려진 상태로 대를 잇게 될 것입니다. 이러면 절망만 있을 뿐 희망의 싹조차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로마서 15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는 , 요즈음으로 말하면 소위 왕따 없는 교회의보편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연합되고 단결해야 함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토록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메시야께서 이 땅에서 하신 사역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 이방 사람들도 이 이스라엘로 인해서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을 받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를 통하여 모든 열방이 축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는 열방과 모든 인간이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 세상을 이루고 져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너희도 서로 받으라. 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 내가 싫은 사람일지라도 받아들이고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비판하지 말고 감싸 주어라’ 이것이 크리스천의 진정한 삶이라고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서로를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사도바울은 그 원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격도 없고, 실수도 많고, 부족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우리들을 받아주셨기 때문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못 본척하고 못 들은 척 하시며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고 용서해주었다면 우리보다 연약한 사람을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받아 주어라. 거부하거나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라.’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너희들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가 아니고 복음이며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한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마땅히 도와야 한다는 말을 계속하는 이유는 바로 9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배척하고 거부했습니다.‘구원은 우리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부정하며 ..마치 개와 같은 자들이다.’ 라며 이방인들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의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 크리스천들이 오자 후다닥 자리를 피했던 사건이 나옵니다. 이것을 들은 바울사도는 베드로 사도를 심하게 질책을 했던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이 아직도 예수를 믿고 나서도 그들의 저변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불러 주신 까닭이 그들을 이방인 구원하는 도구로 쓰기 위함인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자신들만을 위한 하나님으로 착각했던 것 때문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는 이런 생각이 너무도 뿌리 깊게 있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심지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넘어지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꺾어짐으로 인하여 이방인이 구원을 받도록 이스라엘을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더라면 복음이 이방인에게 들어갈 수 없었을 텐데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그 복음이 이방으로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서로 용납하라’는 말의 더 깊은 뜻은 이방인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이방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저주하거나 핍박하거나 괴롭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나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지만 이방인들도 사랑하노라.’이 두 그룹이 서로 인정하고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이방인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조상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조상들과의 약속을 따라서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 그것이 9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방인들은 믿음의 조상이 없습니다. 약속도, 율법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속도 있고 메시아도 있고 구원도 있고 하나님도, 성막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것을 가지고 너무도 교만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만의 하나님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 축복을 주신 것은 그 축복을 통하여 모든 이방인들을 구원할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주셨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긍휼로 구원받은 이방인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약속의 조상들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그들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을 위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사람,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공짜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이방인에게 더 많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내 가족만 사랑해 달라’는 지나친 가족 중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해 주셨지만 다른 사람도 구원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보다도 못하고 형편없는 사람들도 구원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듯이 다른 사람들도 사랑하셨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과 똑같이 사랑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리고 내게 주신 사랑의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경고하십니다.‘서로 받아 들여라.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을 더 기쁘게 여겨라. 다른 사람 잘되는 것을 더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방인을 사랑했다는 것을 매우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을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베드로도 환상 중에 보자기를 내려 부정한 짐승을 주고‘이것을 먹으라’고 성령님께서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런 것은 우리의 전통에 의하면 더러워서 먹지 못합니다.'라며 먹지 않겠다고 거부했지만 하나님이 계속 보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말씀하시면 드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이것을 더럽다 또는 그렇지 않다 판단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보다 더 거룩합니까? 더 높습니까?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4가지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는 시편 18편 49절의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하나님이 이방인을 사랑하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