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의 목회만 계산해도 33년, 한국까지 합칠 경우 41년간 목회한 이경희 목사는 “저 정도면 괜찮은 목회자라 생각했는데 이제 돌아보니 못돼 먹은 교만한 모습으로 목회했다”며 “그러나 주님께서 제가 예수의 심장을 갖고 진실과 사랑으로 목회하려 노력했다는 점만은 기억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1월 11일 열린 시카고 지역 연합감리교회 한인 목회자들의 신년하례회는 갈릴리교회가 호스트했다. 올해로 33년이니 87년 역사를 가진 시카고한인제일연합감리교회를 제외하면 갈릴리교회가 시카고에서 가장 오래된 연합감리교회다. 이 목사가 개척해 33년간 담임으로 목회했으며 그는 올해 6월 은퇴한다. 갈릴리교회는 이 목사의 은퇴를 앞두고 지역 형제 교회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번 행사를 호스트하게 됐다.
신년하례회에서 설교를 맡은 이 목사는 “목사가 목사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알 것”이라며 자신의 목회를 회고하는 형식으로 메시지를 대신했다.
그는 3년간 충남 아산에서 농촌목회를 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배재고등학교 교목으로 자리를 옮겨 5년간 있었다. 이 목사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배재 동문의 홈커밍데이가 되면 한국의 제자들이 비행기표까지 보내 주며 초청할 정도니 얼마나 제가 인기가 좋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는 목사의 아들로서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드려졌고 말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한 기도가 ‘우리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였다”고 했다. 이쯤 되니 “나 정도면 꽤나 좋은 목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갈릴리교회를 개척한 후에는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다. 그것이 선지자적인 목회자의 모습이라 생각했고 멋진 목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동료 목회자들에게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대나무 꼬챙이처럼 콕콕 찌르고 비판해 면도칼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목회를 마무리 하는 이 시점 그는 “참 교만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한국에서 10만, 6만명 대형교회를 일구어 목회하고 있는 신학교 동기들의 모습을 보며 늘 “교회만 크면 다냐”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을 방문해 동기들의 초청으로 그 교회 강단에 섰을 때, 금요찬양예배에 1만명 이상 참석해 뜨겁게 기도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제가 늘 이 친구를 비판해 왔는데 ‘여러분’들을 보니 이 친구는 제가 갖지 못한 은사를 가진 것을 인정합니다”라고 고백했다. 대형교회가 가진 성도 수가 아니라 그들의 뜨거운 기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신년하례회에 참석한 후배 목회자들에게 “제가 잘난 줄 알고 멋있는 줄 알고 목회해 왔는데 지금 돌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고 큰 믿음을 갖고 성도들을 이끌지도 못해 하나님 앞에 아무런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한가지, 제가 예수의 심장으로 진실과 사랑을 갖고 목회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후배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날 참석한 우민혁 목사는 “이 목사님은 자신의 삶 가운데 성공적이지 못했던 부분들을 많이 말씀하셨지만 30년이 넘도록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고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시는 모습이 후배 목사로서 참 존경할만한 부분”이라며 “그런 면에서 목사님을 치하드리고 싶고, 올곧은 태도로 이민목회에 헌신하신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된다”고 소감을 전했다. 또 다른 한 참석자는 “목회자라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마무리 시점에 선 이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목회의 본질과 참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경희 목사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나 7살 때 월남했다. 배재고, 감신대 신학과, 경희대 음대작곡과를 졸업했다. 배재남성합창, 배재글리클럽에서 지휘했고 감리교 어린이찬송가 편집위원, 시카고대학목회 이사장, 연합감리교 한영찬송가편집위원, 통일위원회 중북부위원장 등을 지냈다. 이경희 목사의 아버지는 2002년 별세한 이태선 목사로, 그는 수원제일감리교회를 개척해 43년간 담임하고 은퇴한 한국 감리교단의 원로이며 어린이찬송시인이자 아동문학가로 명성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