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만이 역사를 음미할 수 있다. 시간 자체에는 매듭이 없건만 인간의 논리적 기능은 분석적이어서 5선지 위에 소절을 매기듯 흐르는 시간에 구획을 지어 새 해와 묵은 해를 가른다.

원래 정월(January)이라는 말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Janus)에서 유래된 말이다. 야누스의 두 개의 얼굴 중 하나는 지나가는 해를 보고, 다른 하나는 다가오는 새 해를 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정월 1월에 ‘회고’와 ‘전망’이 엇갈리는 모양이다.

세월이 흐른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상처를 아물게 해주고 비통한 것을 잊게 해 주니 고마운 일이다. 시간의 경과에서 불의가 쇠잔하고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나며 진실이 드러나고 진상이 밝혀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또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늙어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 한 걸음 다가간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현실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고후4:16). 그 이유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늙어지는 것은 겉사람 이지, 예수께서 살리신 우리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예수가 없는 어제의 깨달음보다 주 안에 있는 오늘의 깨달음이 더 높고, 사랑이 없는 어제의 인간보다 사랑을 체험한 오늘의 인간이 더 성숙하다. 그래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육신의 눈이 희미해질 때 영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모습이 더 뚜렷이 보이고, 육신의 귀가 어두워질 때 하늘의 음성이 더 분명히 들려오고, 기억력이 희미해 질 때 과거의 은총이 더 똑똑히 기억난다. 사실 성경의 단맛은 육신의 눈이 나이 들어 돋보기를 끼고 읽을 때 참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변의 모든 것이 죽어가고 낡아지고 소모되어 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기에 하나님만이 참 복된 소식을 준다.

겉사람으로 하여금 늙도록 두자. 그것은 우리가 좌우할 영역이 아니다. 그러나 새해에는 속사람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한 해가 되도록 하자. 늙음을 늙음대로 수용하고 수렴하자.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도 믿음이 없는 연고인 것이다. 참다운 가치는 ‘우리들이 무엇을 완수했는가 보다는 무엇을 다시 시작하느냐?’이고, ‘우리가 무엇을 소유했는가 보다는 무엇을 바라보는가?’에서 온다. 그래서 새 해가 있는 이유는 새로이 결단하고 다시 고쳐 쓰고, 다시 시작하고 또 출발하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미래를 모른다 아니 알 수 없는 존재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를 모르게 하셨던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겐 축복이다.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새 해가 올 때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더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고, 2011년 새 해는 이러한 새 꿈을 가진 사람들로 인해 새로워 질 것이다.

우리가 새로워 질 수 없는 이유는 지나간 죄악(혹은 2010년의 불미스러운 일들)에 사로잡혀 있을 때이다. 새로워지려는 것에 대한 인류 최대의 난적인 죄와 악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 해를 희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박상원 목사_ SAM-USA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