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는 우리가 서로서로를 받는 다는 것은 성경이 명시하지 않은 지엽적인 문제로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롬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롬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고린도 교회에 보면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장에 나와 있는 고기의 대부분은 우상 신에게 제사한 제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물을 사다먹는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비판하기를 우상 신에게 제사 한 것을 먹는 자들은 그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난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고기는 고기일 뿐이며 다 같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써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는 주장입니다. 날을 지키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순절을 지킨다든지, 아니면 오순절이라든지 아니면 안식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든지 하는 문제는 다 성경이 명시하고 있지 않은 부분들입니다. 사순절을 지킨다고 신앙이 더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주일 대신 안식일을 지킨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롬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각자 마음에 확정한대로 지키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골프를 처야 하는가? 화장을 해도 되는가? 아니면 성형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크리스천의 간증이 막히지는 않을 것인지 우리는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다른 점 때문에 서로를 조롱하거나, 욕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들과 한사람이 아닌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식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헛된 우월감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리를 향한 바리새인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에서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동생을 비난하고 아버지를 원망한 맏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7-12절에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심판의 주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상대를 바꾸게 하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관관계에 관한 한두 가지 금해야 될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변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변화를 일으키는 조건은 형성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변화 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변화 시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 수렁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안 일어나니까 신경질이 나고 상대적으로 더 큰 실망과 좌절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락 할 일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을 비판하는 일입니다. 왜 판단하지 말고 비판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우리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하는 것입니다.
고전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스스로를 판단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 하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자학의 늪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애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정확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다 끝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도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주님께서 완성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서로를 받아야 하는가?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절)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나랑 Agree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선에 가시가 있음에도 그것을 좋아 하듯이 우리의 형제 중에 나와 상이한 다른 점- 나에게 Bother가 되는 점이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용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2. 나랑 다른 점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롬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3. 나랑 다른 사람의 동기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롬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의 상급이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게 너무 감사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위하여 한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왜내면 우리의 동기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가 다른 것도 그 동기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서로서로 연결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판단하는 것- 정죄하는 것은 바로 내 얼굴에 침 뱉듯이 나를 판단하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는 한 몸으로 연결 되어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5.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만이 심판 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한다면 제가 한국에서 개척을 할 때인데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제 개척하는 교회가 부흥되려면 좋은 성도들을 보내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어떤 분은 우리 교회에 오면 말썽을 부릴 것 같은 분들이 오십니다. 저런 사람은 안 왔으면 하는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데 이 교회가 네~·교회냐? 하시는 겁니다.
아니지요. 주님의 교회지요. 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을 보내주십사~기도해야 할 것이 아니냐~~하고 제 마음에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교회는 특수층이 모이는 클럽이 아니고 병원이 되어야 하는 구나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치료 받는 병원 그것이 교회가 있어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6. 우리가 서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심판 날에 우리에게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롬 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리에서 부활 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옆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저 요한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은 네 할 일 이나 해라·~이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하는 것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삽니다.
그러나 본문 12절은 우리 각자의 일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심판 날에 나 외에는 나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합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변화된 삶의 증거는 바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납 할 수 없는 그 부분을 서로 용납하고 서로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롬 14: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롬 14: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고린도 교회에 보면 고기를 먹는 것 때문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시장에 나와 있는 고기의 대부분은 우상 신에게 제사한 제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물을 사다먹는 크리스천들을 향해서 비판하기를 우상 신에게 제사 한 것을 먹는 자들은 그 우상에게 제사를 드린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난 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고기는 고기일 뿐이며 다 같은 하나님이 주신 음식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로써 얼마든지 먹어도 괜찮다는 주장입니다. 날을 지키는 것도 마찬 가지입니다. 사순절을 지킨다든지, 아니면 오순절이라든지 아니면 안식일을 주일로 지켜야 한다든지 하는 문제는 다 성경이 명시하고 있지 않은 부분들입니다. 사순절을 지킨다고 신앙이 더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주일 대신 안식일을 지킨다고 신앙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롬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각자 마음에 확정한대로 지키는 자유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골프를 처야 하는가? 화장을 해도 되는가? 아니면 성형을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 크리스천의 간증이 막히지는 않을 것인지 우리는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다른 점 때문에 서로를 조롱하거나, 욕하거나,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저들과 한사람이 아닌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런 식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헛된 우월감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리를 향한 바리새인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비유에서 집나간 동생이 돌아오자 동생을 비난하고 아버지를 원망한 맏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7-12절에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심판의 주이심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상대를 바꾸게 하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관관계에 관한 한두 가지 금해야 될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변화 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변화를 일으키는 조건은 형성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변화 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변화 시키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하려고 하면 할수록 스스로 수렁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안 일어나니까 신경질이 나고 상대적으로 더 큰 실망과 좌절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락 할 일이 아니며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을 비판하는 일입니다. 왜 판단하지 말고 비판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우리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하는 것입니다.
고전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스스로를 판단치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판단 하다가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자학의 늪에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애가 나를 판단하는 것이 정확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다 끝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도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 주님께서 완성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서로를 받아야 하는가?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3절)
내가 하나님보다 지혜롭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나랑 Agree 하지 못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선에 가시가 있음에도 그것을 좋아 하듯이 우리의 형제 중에 나와 상이한 다른 점- 나에게 Bother가 되는 점이 있더라도 우리가 서로를 용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이 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2. 나랑 다른 점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롬 14: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3. 나랑 다른 사람의 동기가 무엇인지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롬 14: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롬 14: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의 상급이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닌 게 너무 감사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를 위하여 한 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실 것입니다. 왜내면 우리의 동기는 하나님만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형제가 다른 것도 그 동기를 우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4. 우리는 서로서로 연결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판단하는 것- 정죄하는 것은 바로 내 얼굴에 침 뱉듯이 나를 판단하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는 한 몸으로 연결 되어서 지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5.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만이 심판 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롬 14: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한다면 제가 한국에서 개척을 할 때인데 그때 기도하면서 하나님 이제 개척하는 교회가 부흥되려면 좋은 성도들을 보내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어떤 분은 우리 교회에 오면 말썽을 부릴 것 같은 분들이 오십니다. 저런 사람은 안 왔으면 하는데 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는데 이 교회가 네~·교회냐? 하시는 겁니다.
아니지요. 주님의 교회지요. 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사람을 보내주십사~기도해야 할 것이 아니냐~~하고 제 마음에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교회는 특수층이 모이는 클럽이 아니고 병원이 되어야 하는 구나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이 치료 받는 병원 그것이 교회가 있어야 할 본분인 것입니다.
6. 우리가 서로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심판 날에 우리에게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롬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롬 14: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갈릴리에서 부활 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옆에 있는 요한을 가리키면서 저 요한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은 네 할 일 이나 해라·~이었습니다. 우리는 남들이 하는 것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삽니다.
그러나 본문 12절은 우리 각자의 일에 관심을 두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심판 날에 나 외에는 나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합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변화된 삶의 증거는 바로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납 할 수 없는 그 부분을 서로 용납하고 서로를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교회답게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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