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가 답할 차례다.
미국과 서유럽 등 기독교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동성애와 관련해 홍역을 치른 바 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는 일찍이 <현대 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Decisive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속 동성애 항목을 따로 묶어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동성간의 결혼도 가능한가?(Same-Sex Partnerships?, 홍성사)>로 편찬할 정도다. 제목부터 동성애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서구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다.
존 스토트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윤리적 도전 가운데서 ‘동성애’ 혹은 ‘게이’ 논쟁만큼 급진적인 것은 없다”며 동성애 논쟁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와 성경의 주요 본문에 대한 입장, 동성애 지지자들의 5가지 주요 주장 등을 다루고 있다. 물론 존 스토트는 동성애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입장이고 우리도 이를 다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떠한 논리를 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 주제가 매우 민감하다”고 인정하는 존 스토트는 ‘호모포비아(동성애 공포증)’와 ‘호모필리아(동성애 애호)’로 양극화된 상황에서 이들 대안 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사고방식을,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성경적인 태도와 접목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 그리고 성과 결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성경 본문은 네 곳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돔 이야기(창세기 19:1-13)와 레위기(18:22, 20:13), 바울의 로마서(1:18-32)와 두 서신(고전 6:9-10, 딤전 1:8-11)이다. 소돔 이야기는 기브아 이야기(삿 19)와 흡사하다. ‘호모필리안’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이같은 언급이 네 차례에 불과함을 든다. 또 이 본문들이 말씀의 주요 취지에서 벗어난 주변적인 언급일 뿐이고,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고까지 항변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손님 대접이 부실해 멸망했고, 레위기 본문들은 이교 의식을 금지한 것이며, 로마서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방탕함을, 두 서신에서는 남성간 성매매를 지적한다는 주장이다.
존 스토트는 말한다. “이러한 결론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그렇게 다룰 수는 없고 기독교가 동성애 행위를 거부하는 근거는 전통적 해석을 뒤엎는 ‘몇몇 따로 떨어져 있고 모호한 번문들’ 때문이 아니다”며 “나로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게 불편하다”고.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인’ 금기는 인간의 성과 이성애 결혼에 대한 창세기 1-2장의 ‘긍정적인’ 가르침에 비춰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동성애 허용론자들은 이성애와 동성애를, 이성애자들의 결혼과 동성애자들의 ‘동반자 관계’를 의도적으로 대등하게 양립시키는 전략을 편다. 하지만 존 스토트는 이것이 성경에 비춰볼 때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창세기 1-2장의 결혼에 대한 기본 진리는 △인간은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인간의 욕구를 위해 하나님은 남자에게 여자를, 여자에게 남자를 준비하셨으며 △그 결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다는 3가지다. 스토트는 “본문에 나타나는 이성애의 성관계는 육체의 결합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서로 보완되는 인격간의 융합이며 이를 통해 소외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풍성하고 창조된 하나됨이 다시 경험된다”며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적인 성 기관은 훨씬 더 깊은 영적 보완성을 육체적 차원으로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이성애적 일부일처제가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결혼이나 성관계를 구상하고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른 대안을 마련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성관계를 ‘특별히 정죄해야 할 죄’로 떼내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모든 종류의 성적 관계나 행위-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동거와 비밀 결혼, 가벼운 만남과 한시적 관계, 간음과 이혼, 그리고 동성애 관계-가 사실상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성경이 숙고하고 있는 유일한 ‘한 몸’의 체험은 한 남자가 자신의 살 중의 살이라 인정하는 아내와 가지는 성적 결합이다.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의 ‘반격’
그러나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성과 이성애 결혼 제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동성애 동반자 관계의 합법성을 변호하려 몇몇 반론을 제시한다.
△성경과 문화라는 논거=성경은 모든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여겨지지만,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성경의 저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믿을만한 안내자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첫째, 성경 저자들은 자신의 문화에 얽매여 있어 이들이 동성애와 관련해 가르치는 내용이 적절치 않고 둘째, ‘타고난 동성애 성향’ 등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부분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토트는 “금지의 본문들만 찾아본다면 이같은 반대의견에 답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제도에서 보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하나님의 계시 원칙이 생긴다”며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지하는 이유는 오늘날 서로 사랑하는 ‘동성애 동반자 관계’도 정죄돼야 하는 이유와 같은데, 그것은 바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이성애 일부일처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창조와 자연이라는 논거=하나님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만드셨다는 사람들, 동성애 행위가 원시 사회에서는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다는 사람들에게 존은 이렇게 답한다. “이러한 논거들은 무엇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가에 대해 매우 주관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창조 과정을 통해 성과 결혼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으셨으므로, 정상성이나 자연스러움을 정하는 영원한 기준이 없다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동성애가 초대교회에서 ‘우선적 문제’가 아닌 자유를 허락한 ‘부차적 문제’라거나 여성 안수와 같이 ‘두 가지 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이슈라는 주장에는 “초대교회에서의 부차적 문제들은 주로 신학적이거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었는데 동성애 행위는 그렇지 않고, 결혼에서의 성별 차이는 사역에서의 성별 차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라고 논증한다.
△관계의 질이라는 논거=크리스천들의 레즈비언과 게이 운동단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는 성경의 진리와, 1960년대 이후 사랑이 모든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새로운 도덕’ 혹은 ‘상황 윤리’ 개념-예를 들면 ‘더 이상 왼손잡이에 대한 비난 이상으로 동성애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관계의 성격과 질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스토트는 여기에 세 가지 반제로 맞섰다. 첫째, 동성애 관계에서는 평생 지속되는 결혼과 흡사한 정절의 개념이 신화인 경우가 많고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둘째, 게이들의 일반적 성행위에 따른 피해와 위험에 비춰볼 때 동성애 관계가 이성애 결혼과 동일한 사랑의 방식이라 보기 어렵다. 셋째, 사랑에는 이를 인도할 율법(계명)이 필요하므로, 위 주장의 기본 전제 자체를 성경적 그리스도인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등이다.
△정의와 인권이라는 논거=성별, 피부색, 인종 때문에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듯 성적 기호에 따라서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론에는 “그들이 멸시받고 거부당하거나 동성애 공포증의 희생자라면 그들의 불만은 정당하고 시정돼야 하지만, 이들이 불평하는 ‘부당함’ 또는 ‘불의’가 동성애 관계를 이성애 결혼과 동등하게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라면 ‘정의’에 대한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해설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의하면 성관계는 이성애 결혼 관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게이 해방은 우리 자신의 도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한 목적에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적 반항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덧붙였다.
△용납과 복음이라는 논거=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하는 게 복음이라는 데 대해서는 “복음을 심하게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용납이란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용서’한다는 뜻이지 우리가 죄를 계속 짓는 것을 ‘묵인’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트는 “우리가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회개자로, 동료 순례자로 용납하는 것이지 계속해서 죄를 짓기로 결심한 죄인으로서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에이즈는 정말, 하나님의 심판일까?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에이즈를 동성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자신있게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여기에 신학적으로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 답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재난을 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정한 심판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정절을 지킨 기혼 여성들이나 어린아이 등도 걸린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 혹은 악한 행동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도덕적 세계에 새겨두신 질서인 것 같다”며 “이러한 심판은 문란한 성관계에 성 해방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자유방임적 사회를 향해 계속 허풍을 떨어보라는 도전과도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목회적으로는 “그들을 멀리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지역교회는 교회나 그 지역사회 내 에이즈 환자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실제로 호스피스 운동이 에이즈 환자에게까지 확장된 데는 그리스도인들의 덕이 컸다. 또 철저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무지와 편견, 두려움 그리고 문란한 태도와 싸우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에이즈의 위기는 우리를 행위와 진리의 모든 면에서 진정한 교회, 곧 치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도록 큰 도전을 안겨준다”며 “우리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치유 공동체 자체가 그리스도의 용서로 치유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바울이 제시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삼각대 속에서
기존의 해묵고 반복되는 동성애 논쟁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존 스토트는 “동성애를 하나님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로 본다면 이들에게 동성애 행위와 관계의 중단을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며 믿음과 소망, 사랑의 측면에서 이를 풀이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부르심=스토트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간명하게 정리한다. 이에 따라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성애 결혼이 아니라면 독신과 금욕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며 “성 경험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이 충족을 누리는 핵심이 아니고,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동성애는 믿음의 문제라 말하면서 성욕으로 가득한 이들에게도 ‘독신’이 가능함을 설득한다.
△‘소망’이라는 부르심=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소망이다.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그는 “동성애자들은 부모 중 동성과의 관계에서 결핍을 경험했고, 이를 같은 성 혹은 동성애 관계로 보상하려 한다”며 “이는 결핍과 욕구가 한 쌍을 이룬다는 말이고, 부모의 돌봄을 대체하는 관계도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해결책은 성적 행위 없이 동성을 만나는 데 있고,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러한 관계를 통한 치유가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부르심=안 그런 것 같지만, 교회는 사실 동성애자들을 대하면서 사랑을 보여주는 일에 주로 실패한다. 바로 공포와 적개심, 혐오감이 뒤섞인 ‘호모포비아’다. 동성애자들에게 그 습관을 버리라고 요청하듯 이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은 호모포비아를 버려야 한다. 그는 “레즈비언과 게이 크리스천 운동 단체가 존재하는 자체가 교회를 책망하는 표시라 생각한다”고 일갈했다. 동성애 성향의 핵심에는 깊은 외로움과 상호적 사랑에 대한 본능적 갈증, 정체성의 추구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교회 가족 내에서 이를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쓸 자격이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랑과 이해, 용납과 지지가 바로 제3의 길이다.
스토트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성향을 공개할 필요는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며 “그러나 마음의 짐을 털어놓을 사람, 자신을 경멸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우정과 기도로 지지해 줄 절친한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하나님의 가족 내에서 발전해 나가야 하고, 하나님은 각각의 지역 교회가 따뜻하고 용납하며 지지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는 “진정한 사랑과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자세가 서로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동성애자 그리스도인의 딜레마가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의 기준과 이를 지탱하는 은혜를 받아들일 믿음, 현재의 고통을 넘어 미래의 영광을 보는 소망, 서로를 돌보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실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미국과 서유럽 등 기독교 국가들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동성애와 관련해 홍역을 치른 바 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는 일찍이 <현대 사회와 그리스도인의 책임(Decisive 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 속 동성애 항목을 따로 묶어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동성간의 결혼도 가능한가?(Same-Sex Partnerships?, 홍성사)>로 편찬할 정도다. 제목부터 동성애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걸 보면 서구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다.
존 스토트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윤리적 도전 가운데서 ‘동성애’ 혹은 ‘게이’ 논쟁만큼 급진적인 것은 없다”며 동성애 논쟁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와 성경의 주요 본문에 대한 입장, 동성애 지지자들의 5가지 주요 주장 등을 다루고 있다. 물론 존 스토트는 동성애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입장이고 우리도 이를 다 알고 있지만, 그가 어떠한 논리를 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이 주제가 매우 민감하다”고 인정하는 존 스토트는 ‘호모포비아(동성애 공포증)’와 ‘호모필리아(동성애 애호)’로 양극화된 상황에서 이들 대안 외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사고방식을,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지지하는 성경적인 태도와 접목할 수 있는 기독교적인 방법을 모색한다.
성경이 말하는 동성애, 그리고 성과 결혼
동성애를 부정적으로 언급한 성경 본문은 네 곳으로 분류할 수 있다. 소돔 이야기(창세기 19:1-13)와 레위기(18:22, 20:13), 바울의 로마서(1:18-32)와 두 서신(고전 6:9-10, 딤전 1:8-11)이다. 소돔 이야기는 기브아 이야기(삿 19)와 흡사하다. ‘호모필리안’들은 성경이 동성애를 금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이같은 언급이 네 차례에 불과함을 든다. 또 이 본문들이 말씀의 주요 취지에서 벗어난 주변적인 언급일 뿐이고, 동성애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고까지 항변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손님 대접이 부실해 멸망했고, 레위기 본문들은 이교 의식을 금지한 것이며, 로마서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방탕함을, 두 서신에서는 남성간 성매매를 지적한다는 주장이다.
존 스토트는 말한다. “이러한 결론이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성경의 내용을 그렇게 다룰 수는 없고 기독교가 동성애 행위를 거부하는 근거는 전통적 해석을 뒤엎는 ‘몇몇 따로 떨어져 있고 모호한 번문들’ 때문이 아니다”며 “나로서는 성경의 가르침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게 불편하다”고.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부정적인’ 금기는 인간의 성과 이성애 결혼에 대한 창세기 1-2장의 ‘긍정적인’ 가르침에 비춰볼 때 비로소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동성애 허용론자들은 이성애와 동성애를, 이성애자들의 결혼과 동성애자들의 ‘동반자 관계’를 의도적으로 대등하게 양립시키는 전략을 편다. 하지만 존 스토트는 이것이 성경에 비춰볼 때 옳지 않다고 지적한다. 창세기 1-2장의 결혼에 대한 기본 진리는 △인간은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인간의 욕구를 위해 하나님은 남자에게 여자를, 여자에게 남자를 준비하셨으며 △그 결과로 ‘결혼’이라는 제도가 생겨났다는 3가지다. 스토트는 “본문에 나타나는 이성애의 성관계는 육체의 결합을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서로 보완되는 인격간의 융합이며 이를 통해 소외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인간의 풍성하고 창조된 하나됨이 다시 경험된다”며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적인 성 기관은 훨씬 더 깊은 영적 보완성을 육체적 차원으로 보여주는 상징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이성애적 일부일처제가 아닌 다른 어떤 종류의 결혼이나 성관계를 구상하고 있지 않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른 대안을 마련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동성애 성관계를 ‘특별히 정죄해야 할 죄’로 떼내서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모든 종류의 성적 관계나 행위-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 동거와 비밀 결혼, 가벼운 만남과 한시적 관계, 간음과 이혼, 그리고 동성애 관계-가 사실상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성경이 숙고하고 있는 유일한 ‘한 몸’의 체험은 한 남자가 자신의 살 중의 살이라 인정하는 아내와 가지는 성적 결합이다.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의 ‘반격’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 |
△성경과 문화라는 논거=성경은 모든 동성애 행위를 정죄한다고 여겨지지만,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성경의 저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믿을만한 안내자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첫째, 성경 저자들은 자신의 문화에 얽매여 있어 이들이 동성애와 관련해 가르치는 내용이 적절치 않고 둘째, ‘타고난 동성애 성향’ 등 지금 우리가 말하는 부분에 대해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토트는 “금지의 본문들만 찾아본다면 이같은 반대의견에 답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 결혼이라는 하나님의 제도에서 보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하나님의 계시 원칙이 생긴다”며 “성경에서 동성애를 금지하는 이유는 오늘날 서로 사랑하는 ‘동성애 동반자 관계’도 정죄돼야 하는 이유와 같은데, 그것은 바로 동성애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이성애 일부일처제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창조와 자연이라는 논거=하나님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만드셨다는 사람들, 동성애 행위가 원시 사회에서는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다는 사람들에게 존은 이렇게 답한다. “이러한 논거들은 무엇이 자연스럽고 정상적인가에 대해 매우 주관적인 관점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창조 과정을 통해 성과 결혼에 대한 기준을 세워놓으셨으므로, 정상성이나 자연스러움을 정하는 영원한 기준이 없다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동성애가 초대교회에서 ‘우선적 문제’가 아닌 자유를 허락한 ‘부차적 문제’라거나 여성 안수와 같이 ‘두 가지 타당성’을 인정해야 하는 이슈라는 주장에는 “초대교회에서의 부차적 문제들은 주로 신학적이거나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었는데 동성애 행위는 그렇지 않고, 결혼에서의 성별 차이는 사역에서의 성별 차이보다 훨씬 근본적인 것”이라고 논증한다.
△관계의 질이라는 논거=크리스천들의 레즈비언과 게이 운동단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라는 성경의 진리와, 1960년대 이후 사랑이 모든 관계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는 ‘새로운 도덕’ 혹은 ‘상황 윤리’ 개념-예를 들면 ‘더 이상 왼손잡이에 대한 비난 이상으로 동성애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관계의 성격과 질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스토트는 여기에 세 가지 반제로 맞섰다. 첫째, 동성애 관계에서는 평생 지속되는 결혼과 흡사한 정절의 개념이 신화인 경우가 많고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둘째, 게이들의 일반적 성행위에 따른 피해와 위험에 비춰볼 때 동성애 관계가 이성애 결혼과 동일한 사랑의 방식이라 보기 어렵다. 셋째, 사랑에는 이를 인도할 율법(계명)이 필요하므로, 위 주장의 기본 전제 자체를 성경적 그리스도인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등이다.
△정의와 인권이라는 논거=성별, 피부색, 인종 때문에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듯 성적 기호에 따라서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정의’론에는 “그들이 멸시받고 거부당하거나 동성애 공포증의 희생자라면 그들의 불만은 정당하고 시정돼야 하지만, 이들이 불평하는 ‘부당함’ 또는 ‘불의’가 동성애 관계를 이성애 결혼과 동등하게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라면 ‘정의’에 대한 논의는 부적절하다”고 해설한다.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의하면 성관계는 이성애 결혼 관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한 게이 해방은 우리 자신의 도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한 목적에서 자유를 얻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기 위해 우리의 의지적 반항으로부터 자유를 얻는다”고 덧붙였다.
△용납과 복음이라는 논거=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을 용납하는 게 복음이라는 데 대해서는 “복음을 심하게 혼동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의 용납이란 회개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완전히 그리고 기꺼이 ‘용서’한다는 뜻이지 우리가 죄를 계속 짓는 것을 ‘묵인’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스토트는 “우리가 서로 용납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같은 회개자로, 동료 순례자로 용납하는 것이지 계속해서 죄를 짓기로 결심한 죄인으로서는 아니다”고 잘라 말했다.
에이즈는 정말, 하나님의 심판일까?
▲그러나 동성애를 찬성하는 미국인들은 늘어나고 있다. |
일부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에이즈를 동성애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 자신있게 주장한다. 존 스토트는 여기에 신학적으로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 답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재난을 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정한 심판으로 해석하지 말라고 경고하셨고, 정절을 지킨 기혼 여성들이나 어린아이 등도 걸린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 혹은 악한 행동은 악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도덕적 세계에 새겨두신 질서인 것 같다”며 “이러한 심판은 문란한 성관계에 성 해방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자유방임적 사회를 향해 계속 허풍을 떨어보라는 도전과도 같다”고도 했다.
하지만 목회적으로는 “그들을 멀리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지역교회는 교회나 그 지역사회 내 에이즈 환자들에게 다가가야 하고, 실제로 호스피스 운동이 에이즈 환자에게까지 확장된 데는 그리스도인들의 덕이 컸다. 또 철저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무지와 편견, 두려움 그리고 문란한 태도와 싸우는 데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에이즈의 위기는 우리를 행위와 진리의 모든 면에서 진정한 교회, 곧 치유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되도록 큰 도전을 안겨준다”며 “우리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치유 공동체 자체가 그리스도의 용서로 치유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인다.
바울이 제시한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삼각대 속에서
기존의 해묵고 반복되는 동성애 논쟁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은 무엇일까. 존 스토트는 “동성애를 하나님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행위로 본다면 이들에게 동성애 행위와 관계의 중단을 요청이 받아들여지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며 믿음과 소망, 사랑의 측면에서 이를 풀이하고 있다.
△‘믿음’이라는 부르심=스토트는 믿음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간명하게 정리한다. 이에 따라 믿음은 하나님의 기준을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이성애 결혼이 아니라면 독신과 금욕 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며 “성 경험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이 충족을 누리는 핵심이 아니고,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근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동성애는 믿음의 문제라 말하면서 성욕으로 가득한 이들에게도 ‘독신’이 가능함을 설득한다.
△‘소망’이라는 부르심=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치유’의 가능성에 대한 소망이다.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그는 “동성애자들은 부모 중 동성과의 관계에서 결핍을 경험했고, 이를 같은 성 혹은 동성애 관계로 보상하려 한다”며 “이는 결핍과 욕구가 한 쌍을 이룬다는 말이고, 부모의 돌봄을 대체하는 관계도 하나님의 구원 속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해결책은 성적 행위 없이 동성을 만나는 데 있고, 특히 교회 안에서 이러한 관계를 통한 치유가 가능하다.
△‘사랑’이라는 부르심=안 그런 것 같지만, 교회는 사실 동성애자들을 대하면서 사랑을 보여주는 일에 주로 실패한다. 바로 공포와 적개심, 혐오감이 뒤섞인 ‘호모포비아’다. 동성애자들에게 그 습관을 버리라고 요청하듯 이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은 호모포비아를 버려야 한다. 그는 “레즈비언과 게이 크리스천 운동 단체가 존재하는 자체가 교회를 책망하는 표시라 생각한다”고 일갈했다. 동성애 성향의 핵심에는 깊은 외로움과 상호적 사랑에 대한 본능적 갈증, 정체성의 추구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는데, 교회 가족 내에서 이를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쓸 자격이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사랑과 이해, 용납과 지지가 바로 제3의 길이다.
스토트는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적 성향을 공개할 필요는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며 “그러나 마음의 짐을 털어놓을 사람, 자신을 경멸하거나 거절하지 않고 우정과 기도로 지지해 줄 절친한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동성이든 이성이든 하나님의 가족 내에서 발전해 나가야 하고, 하나님은 각각의 지역 교회가 따뜻하고 용납하며 지지해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신다. 그는 “진정한 사랑과 도덕적 기준을 지키는 자세가 서로 양립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동성애자 그리스도인의 딜레마가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의 기준과 이를 지탱하는 은혜를 받아들일 믿음, 현재의 고통을 넘어 미래의 영광을 보는 소망, 서로를 돌보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랑을 주실 것”이라고 결론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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