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아세아선교협의회(AMA)의 모스코 대회에서 랄프 윈터 박사는 발표문에서 현재 일어나는 새로운 교회 운동이 있는데, 서구적 교회의 개념인 조직과 형식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소위 '교회 없는 기독교'(Churchless Christianity)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주의 루터교 선교사 허버트 호퍼의 말을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는데, 특별히 힌두교 배경을 가진 많은 이들이 개인적 접촉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되었기에 교회 공동체에 나오지 않으면서도 주님을 고백하고 성경을 보며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핍박을 피하는 수단이지만 성령의역사가 저들 속에서 강하게 나타나며 계속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가 없는 선교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앞으로 기독교가 구조적으로 서구적 모습에서 벗어나 자국의 상황에 맞는 기독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보는 구조와 형식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가진 좋은 전통과 문화가 있듯이 각국에서 그들이 가진 기독교적 좋은 전통과 문화가 있다. 그들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우리의 것을 소개하기도 해서 가장 좋은 것을 취사 선택하는 문제는 토착화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사수되어야 하지만 그 진리를 싸고 있는 옷은 그곳에서 찾아야 현지인들이 비로소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란 책에서 스탠리 존스는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그가 인도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감동시켰던 것은 인도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과 같이 살겠다는 마음, 그들이 믿고 있는 힌두교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협은 있을 수 없지만 기독교의 본질인 신학의 토착화가 아니라면 기독교의 모습이 서구의 것으로 비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다. 기독교를 인도인들도 받아들일 수 있고 전통 속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종교로 인식하게 만드는 작업이 그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긴 신학 논쟁을 거쳐 세워진 우리 서구교회 체계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다른 환경 속으로 전해질 때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입니다. 그는 어떠한 인식의 충격도 견딜 수 있으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서구문명과 서구의 교회체계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인도인의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목적에 적합한 것을 독자적으로 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사의 잘못은 우리가 자라난 기독교의 전통적 배경이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례문제에서 수많은 나라에서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침례를 행하기도 한다. 그 지역이 침례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는 세례의 방법과 그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고, 저들이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 비록 우리의 배경과 다르더라도 따라 주는 것이 선교의 기본이다.
예배의 형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경직된 예배형식은 유교문화권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서 그러한 예배형식이나 분위기를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 것은 복음은 절대적이지만 그 전달방식은 현지 문화권에서 해석되고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세계 교회의 다양성과 그 교회들이 가진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저들에게 맞는 기독교를 형성하고 있다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폭 넓은 생각이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수용적 마음은 우리의 보수성을 벗고 타교회에 대한 긍정적 생각과 열린 마음 자세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핍박을 피하는 수단이지만 성령의역사가 저들 속에서 강하게 나타나며 계속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가 없는 선교지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앞으로 기독교가 구조적으로 서구적 모습에서 벗어나 자국의 상황에 맞는 기독교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성경이 보여주는 교회의 모습은 우리가 보는 구조와 형식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가진 좋은 전통과 문화가 있듯이 각국에서 그들이 가진 기독교적 좋은 전통과 문화가 있다. 그들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우리의 것을 소개하기도 해서 가장 좋은 것을 취사 선택하는 문제는 토착화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은 사수되어야 하지만 그 진리를 싸고 있는 옷은 그곳에서 찾아야 현지인들이 비로소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란 책에서 스탠리 존스는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를 심도 깊게 다루고 있다. 그가 인도의 정치 지도자들이나 종교 지도자들을 감동시켰던 것은 인도인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과 같이 살겠다는 마음, 그들이 믿고 있는 힌두교 사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타협은 있을 수 없지만 기독교의 본질인 신학의 토착화가 아니라면 기독교의 모습이 서구의 것으로 비치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다. 기독교를 인도인들도 받아들일 수 있고 전통 속에서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종교로 인식하게 만드는 작업이 그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긴 신학 논쟁을 거쳐 세워진 우리 서구교회 체계의 어떤 부분은 완전히 다른 환경 속으로 전해질 때 그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보편적입니다. 그는 어떠한 인식의 충격도 견딜 수 있으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서구문명과 서구의 교회체계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오로지 인도인의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목적에 적합한 것을 독자적으로 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교사의 잘못은 우리가 자라난 기독교의 전통적 배경이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생각으로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례문제에서 수많은 나라에서는 장로교나 감리교의 배경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침례를 행하기도 한다. 그 지역이 침례를 행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는 세례의 방법과 그 의미를 잘 말해 주고 있고, 저들이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 비록 우리의 배경과 다르더라도 따라 주는 것이 선교의 기본이다.
예배의 형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경직된 예배형식은 유교문화권에서는 맞을지 모르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성경에서 그러한 예배형식이나 분위기를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 것은 복음은 절대적이지만 그 전달방식은 현지 문화권에서 해석되고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세계 교회의 다양성과 그 교회들이 가진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을 잘 이해하고 저들에게 맞는 기독교를 형성하고 있다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폭 넓은 생각이 한국 교회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수용적 마음은 우리의 보수성을 벗고 타교회에 대한 긍정적 생각과 열린 마음 자세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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