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간 목회자와 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관상기도’를 주제로 학술강연회가 열렸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개교 123주년을 맞아 제28회 양주삼 학술강연회를 2일 오후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중강당에서 열었다. ‘관상기도의 영성신학적 의미’를 제목으로 감신대 이후정 교수가 발표했고, ‘관상기도, 그 실제와 목회적 함의’를 제목으로 감신대 안석모 교수가 발표했다.
먼저 이 교수는 “관상이라는 말은 원천적으로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선·미의 궁극적인 이데아 혹은 지고의 실제에 대한 인식과 만남의 목표를 뜻한다”고 관상의 의미를 정의했다.
관상기도는 최근 한국교회에서 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세상적 가치에 바탕을 둔 기복적 기도와 부흥회식 습관에 따라 울부짖는 기도에 사람들이 염증을 느끼면서 그 대안으로, 조용히 내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의 신비적 합일을 강조하는 관상기도가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그 기원이 가톨릭이고 무엇보다 성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보수적 교계를 중심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이 교수는 “성 어거스틴은 교회의 감독, 목회자로서 신비적 관상에 대해 좀 더 목회적이자 공동체적 접근을 보여줬다”며 “때로 관상이 신비가들에게 있어 개인주의적 기조를 띠기 쉬운 반면, 어거스틴의 교회적 신비주의는 좀 더 공동체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으로 균형을 회복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정통 교부로 인정받는 어거스틴에게서 관상기도의 흔적이 발견되므로, 관상기도를 무조건 배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교수는 어거스틴이 관상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랑을 꼽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어거스틴의 관상에 대한 묘사는 그가 매우 강조했던 사랑의 은혜와 밀접히 연결돼 있다”며 “하나님을 영적으로 보는 직접적인 접촉(관상)을 위해 마음의 집중과 청결함이 요구되는데,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과 모든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이뤄진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고 밝혔다.
두번째 강연자로 나선 안 교수는 서구와 가톨릭에서 유래한 관상기도를 한국교회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고, 특히 용어에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관상기도라는 용어가 교회나 신학의 담론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관상’의 정의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며 “관상과 구별되는 ‘meditation’(묵상)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최근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들이 미국의 영성운동 중 하나인 ‘레노바레’(renovare)운동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미국에서는 관상을 뜻하는 원어 ‘contemplation’보다는 오히려 ‘meditation’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럼에도 이 둘의 구별 없이 단순히 ‘관상기도’라는 용어만을 사용해 혼란이 가중됐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레노바레 운동에서 주로 사용되는 ‘meditation’과 가톨릭의 ‘관상’이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설명도 없이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며 “그렇지 않아도 명상과 관상의 차이 등으로 고민해야 하는 한국교회에 이는 더욱더 혼란을 가중시킨 격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한국교회가 관상기도를 무조건 이단으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용어의 정확한 개념과 뜻을 풀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관상기도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에 대해 보다 세밀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에 두었으면 한다”며 “최근의 관상기도 운동을 그 명칭을 새롭게 정의해 온전한 용어로 정립하고 그 내용의 신학적, 신앙적 배경을 충분히 설명해 한국교회에 창조적으로 활용함은, 어려움에 처한 한국교회에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감리교신학대학교는 개교 123주년을 맞아 제28회 양주삼 학술강연회를 2일 오후 서울 냉천동 감리교신학대학교 백주년기념관 중강당에서 열었다. ‘관상기도의 영성신학적 의미’를 제목으로 감신대 이후정 교수가 발표했고, ‘관상기도, 그 실제와 목회적 함의’를 제목으로 감신대 안석모 교수가 발표했다.
먼저 이 교수는 “관상이라는 말은 원천적으로 플라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진·선·미의 궁극적인 이데아 혹은 지고의 실제에 대한 인식과 만남의 목표를 뜻한다”고 관상의 의미를 정의했다.
관상기도는 최근 한국교회에서 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세상적 가치에 바탕을 둔 기복적 기도와 부흥회식 습관에 따라 울부짖는 기도에 사람들이 염증을 느끼면서 그 대안으로, 조용히 내면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과의 신비적 합일을 강조하는 관상기도가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관상기도는 그 기원이 가톨릭이고 무엇보다 성경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보수적 교계를 중심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에 이 교수는 “성 어거스틴은 교회의 감독, 목회자로서 신비적 관상에 대해 좀 더 목회적이자 공동체적 접근을 보여줬다”며 “때로 관상이 신비가들에게 있어 개인주의적 기조를 띠기 쉬운 반면, 어거스틴의 교회적 신비주의는 좀 더 공동체적 사랑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으로 균형을 회복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정통 교부로 인정받는 어거스틴에게서 관상기도의 흔적이 발견되므로, 관상기도를 무조건 배척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교수는 어거스틴이 관상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랑을 꼽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어거스틴의 관상에 대한 묘사는 그가 매우 강조했던 사랑의 은혜와 밀접히 연결돼 있다”며 “하나님을 영적으로 보는 직접적인 접촉(관상)을 위해 마음의 집중과 청결함이 요구되는데, 그러한 마음은 하나님과 모든 이웃에 대한 사랑 안에서 이뤄진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했다”고 밝혔다.
두번째 강연자로 나선 안 교수는 서구와 가톨릭에서 유래한 관상기도를 한국교회가 무분별하게 받아들였고, 특히 용어에 있어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점을 지적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관상기도라는 용어가 교회나 신학의 담론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관상’의 정의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며 “관상과 구별되는 ‘meditation’(묵상)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안 교수에 따르면 최근 한국의 몇몇 대형교회들이 미국의 영성운동 중 하나인 ‘레노바레’(renovare)운동을 한국에 소개하면서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미국에서는 관상을 뜻하는 원어 ‘contemplation’보다는 오히려 ‘meditation’를 더 많이 사용했다.
그럼에도 이 둘의 구별 없이 단순히 ‘관상기도’라는 용어만을 사용해 혼란이 가중됐다는 게 안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레노바레 운동에서 주로 사용되는 ‘meditation’과 가톨릭의 ‘관상’이 어떤 차별성을 갖는지 설명도 없이 관상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며 “그렇지 않아도 명상과 관상의 차이 등으로 고민해야 하는 한국교회에 이는 더욱더 혼란을 가중시킨 격이 되고 말았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한국교회가 관상기도를 무조건 이단으로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용어의 정확한 개념과 뜻을 풀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관상기도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에 대해 보다 세밀한 이론적 논의를 바탕에 두었으면 한다”며 “최근의 관상기도 운동을 그 명칭을 새롭게 정의해 온전한 용어로 정립하고 그 내용의 신학적, 신앙적 배경을 충분히 설명해 한국교회에 창조적으로 활용함은, 어려움에 처한 한국교회에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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