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어느 모임에 가보니 주제가 “한반도 平和(평화)”였다. “이 땅에 전쟁을 막아 달라”는 부르짖음이 반복돼 나왔다. 맞물려 “북한의 지도자들이 굶주리는 백성들을 걱정하게 해 달라”, “남북이 서로를 사랑하게 해 달라”는 기도제목이 같이 올라 있다.

얼마 전 동네 가장 큰 교회에 갔던 기억이 났다. 보수적인 이 목사님은 평양의 가짜교회 ‘봉수교회’ 홍보영상을 트시며 선전대(?)도 불렀다. 이곳에서 모아질 헌금은 북한의 地下(지하)교인을 죽이고 가두는 데 쓰일 것이다. 알면서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는 매한가지다. 어이가 없었다.

한국의 교회를 돌면서 접하는 당혹스러움은 철두철미한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이다. 북한정권의 邪惡(사악)함을 말하면 평화를 깨고 사랑에 반하는 양 손사래 친다. 한 발 나가 북한정권의 평화적 교체와 같은 헌법의 원칙을 말하면 “어떻게 그렇게 극단적 생각을 하느냐”고 반발한다. 그리고 “人道的(인도적) 지원”과 같은 고상한 空論(공론)에 목소리 높인다.

“북한 인권”을 말하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줘야 한다’는 수준에 그친다. 북한의 정권은 끝내고 주민에 자유를 주자는 自由統一(자유통일)의 주장은 교회 안에서 격렬한 반발, 냉소적 비웃음을 부르거나 무시무시한 혁명적 발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 교회 대다수가 북한을 보는 시각은 ‘햇볕정책’이다. ‘평화’를 말하지만 평화의 主敵(주적)인 북한정권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렸다. ‘사랑’을 말하지만 북한주민에게 줘야 할 것은 食糧(식량) 이전에 自由(자유)임을 생각지 않는다.

중국에서 위스키 한 병 값에 팔리는 수십만 북한여성들을 구하는 대신, 강제송환 후 영아살해·강제낙태·자궁검사·뽐쁘질 등 끝없이 유린당하는 탈북자들을 살리는 대신, 거주·이전·직업선택 그리고 신앙의 자유도 없이 살아가는 2400만 동포들을 멍에를 부수는 대신 오직 정권만 돕는다. 정권만 도우며 사랑과 평화를 읊조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국 교회 대다수가 북한을 향해 외치는 사랑은 나와 가족에 대한 사랑이다. 평화는 나와 가족의 평화일 뿐이다. 그래서 절박한 사랑과 평화의 외침엔 正義(정의)와 公義(공의)가 결핍돼 있다.

한국 기독교인이 遇行(우행)을 거듭하면 김정일 사후 북한은 중국에 넘어갈 것이다. 중국이 동북3성 국경을 개방해 북한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서서히 장악해 간다 해도 속으론 박수칠 것이다. 마음 속 한 가지 부담은 북한의 굶주림 정도였기 때문이다. 餓死者(아사자)가 사라져 ‘사랑’을 이루고 핵무기도 중국이 통제해 ‘평화’도 이루니 한국 기독교인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있는가? 이 지독한 안일, 이기심, 비겁함, 두려움이 가져올 미래는 참담하다. 휴전선 이남의 대한민국은 점증하는 친중·반미·종북·좌파세력에 잠식당할 것이고 좌경화된 포퓰리즘이 판치는 南美(남미)식 몰락을 경험할 것이다. 빈곤은 빈곤을 부리고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능력의 증강과 함께 연방제 형태의 赤化(적화)를 거칠지 모른다. 이것이 한반도 안팎의 불안을 증폭할 것임은 물론이다.

성경이 말하듯 우리의 탐심이 부를 결과는 자명하다. ‘평화’와 ‘사랑’이 아니다. “칼(전쟁)”과 “饑饉(기근)”, 우리 후세들의 비참한 미래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