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한 번쯤 이런 교회, 다녀보고 싶다고. 한국의 기와지붕이 가장 아름다운 곡선을 가졌다 했는데, 부정할 수 없겠다. 곧고 힘차게 올라간 화강암 벽에 부드럽게 올라 선 기와. 여기, 이 도시에 이런 교회라니.
서울 월계동 장석교회를 찾은 날, 유난히도 가을빛이 깊었다. 전통 한옥의 지붕을 본따 지어진 교회는 그렇게 가을과 어울려 만추(晩秋)의 여유를 즐기는 듯했다. 이용남 목사도 그만큼 편안해보였고,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래 하다 보니 타성에 빠지는 것 같고, 교회도 성장하니까 마치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처럼 우쭐해지기도 하고…….”
솔직히 이런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첫 질문이었으니, 그저 가볍게 “지난 날, 돌아보니 어떠세요”라고 물었을 뿐, 이렇게 진지해질 줄은 몰랐다. 좀 더 대화가 오간 후에나 자연스레 ‘고비가 있었느냐’ ‘고민은 없느냐’고 물어볼 참이었는데. 그래도 그가 먼저 이렇게 솔직하게 빗장을 푸니 오히려 편했다.
“주변에서 ‘목사님, 목회 잘 하신다’고 칭찬들을 하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합니다. 그게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아마 평생 이것과 씨름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말이죠.”
이 목사는 지난 1985년 장석교회로 부임해 올해 26년째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장석교회가 처음은 아니다. 1976년 영은교회 시절까지를 합하면 그는 담임으로 35년을 목회했다. 인생의 절반을 목자로 산 셈이다.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목회할 수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전 그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전했을 뿐인데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인터뷰 내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많이 했다. 기자는 애써 다른 말을 유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너무 많이 말해서 너무 익숙해진 말. 너무 많이 들어서 너무 진부해진 말. 그런데 그가 말한다.
“저도 좀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싶지만 이 말 밖에는 생각나질 않네요. 한때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대로, 누구나 하는 말이니 따라서 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내가 한 게 하나도 없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 가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렵다.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어렵지 않은 진리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자신의 삶도 그러하다 했다. 사랑하라는, 믿으라는, 희생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앞에 두고도 그것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지금까지 머리로만 알았던 그것을 비로소 가슴으로 느낀다고 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낍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느냐죠. 전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목회할 수 있으니까요. 가끔 길을 지나다 보면 초라한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교회가 보여요. 저 교회 목회자는 얼마나 힘들까, 하나님께서 나더러 저 교회에서 목회하라면 나는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남은 인생,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죠.”
단순하고 담백하다는 느낌. 그가 하는 말은 다 그랬던 것 같다. 목회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예수 믿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 교회 잘 다니게 하고, 교회 잘 다니는 사람 헌신하게 하는 게 제 목회관입니다.”
더는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이 이상 무슨. 알고 보면 모든 목회자들의 삶이 이렇지 않은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 이 목사의 삶 또한 그랬다.
그런 이 목사는 지금의 한국교회를 어떻게 볼까. 그에게 오늘날 한국교회를 진단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젠 누구라도 한국교회의 위기를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를 물었다. 그 옛날, 교회가 아직 어렵고 힘들었을 때를.
“그 땐 지금처럼 목회 자료도 별로 없었고 목회 환경도 좋지 않았죠. 교회도 작았을 뿐더러 기독교의 영향력도 아직은 미미했을 때니까요. 하지만 훌륭한 목회자는 그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이죠.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본질상 핍박과 함께 자라는 것 같아요. 핍박이 없으면 그 생명력을 잃는다는 말이죠. 교회가 커지고 목회 환경이 좋아지면서, 기독교의 크기는 커졌을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습니다.”
세월을 견딘 목자의 머리는 희끗했다. 그의 눈이 창밖을 향한다. “그래도 한국은 기독교에 빚졌어요.” 창 밖에 내려앉은 햇살에서 잠시 옛날을 본 것일까. 이 한 마디를 던지곤, 그는 잠깐의 침묵에 빠졌다. “어떤 빚 말입니까?” 기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한국의 민주주의, 현대식 교육과 의료제도, 여성들의 향상된 인권에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 수 있는 건, 개인적으로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역사를 기독교 없이 설명할 수 있습니까. 비록 지금, 기독교에 위기가 왔다고는 하나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주체 역시 전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과거, 교회가 극동 작은 나라의 새벽을 깨웠듯이 말이죠.”
극동 작은 나라…, 그러고 보니 한국은 참 초라했던 나라였다. 땅, 자원, 힘, 무엇하나 가진 게 없는. 그런 나라가 G20이라는, 국제적 회의를 개최한다. 그것도 의장국으로. 하나님의 축복일까. 누군가는 이 말에 발끈하겠지. 또 누군가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규정해선 안 된다고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입니다. 아멘.”
서울 월계동 장석교회를 찾은 날, 유난히도 가을빛이 깊었다. 전통 한옥의 지붕을 본따 지어진 교회는 그렇게 가을과 어울려 만추(晩秋)의 여유를 즐기는 듯했다. 이용남 목사도 그만큼 편안해보였고,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래 하다 보니 타성에 빠지는 것 같고, 교회도 성장하니까 마치 내가 잘 해서 그런 것처럼 우쭐해지기도 하고…….”
솔직히 이런 대답을 기대했던 건 아니다. 첫 질문이었으니, 그저 가볍게 “지난 날, 돌아보니 어떠세요”라고 물었을 뿐, 이렇게 진지해질 줄은 몰랐다. 좀 더 대화가 오간 후에나 자연스레 ‘고비가 있었느냐’ ‘고민은 없느냐’고 물어볼 참이었는데. 그래도 그가 먼저 이렇게 솔직하게 빗장을 푸니 오히려 편했다.
“주변에서 ‘목사님, 목회 잘 하신다’고 칭찬들을 하면,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곤 합니다. 그게 제일 무서운 것 같아요. 아마 평생 이것과 씨름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떨어지지 않는 그림자처럼 말이죠.”
이 목사는 지난 1985년 장석교회로 부임해 올해 26년째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장석교회가 처음은 아니다. 1976년 영은교회 시절까지를 합하면 그는 담임으로 35년을 목회했다. 인생의 절반을 목자로 산 셈이다.
“참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긴 세월 동안 목회할 수 있어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전 그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전했을 뿐인데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이 목사는 인터뷰 내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많이 했다. 기자는 애써 다른 말을 유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하나님의 사랑, 은혜…, 너무 많이 말해서 너무 익숙해진 말. 너무 많이 들어서 너무 진부해진 말. 그런데 그가 말한다.
“저도 좀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싶지만 이 말 밖에는 생각나질 않네요. 한때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대로, 누구나 하는 말이니 따라서 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내가 한 게 하나도 없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고백이 가슴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어렵다. 들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어렵지 않은 진리지만 그것을 실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자신의 삶도 그러하다 했다. 사랑하라는, 믿으라는, 희생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말을 앞에 두고도 그것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단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지금까지 머리로만 알았던 그것을 비로소 가슴으로 느낀다고 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낍니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느냐죠. 전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목회할 수 있으니까요. 가끔 길을 지나다 보면 초라한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교회가 보여요. 저 교회 목회자는 얼마나 힘들까, 하나님께서 나더러 저 교회에서 목회하라면 나는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남은 인생, 하나님께 충성하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죠.”
단순하고 담백하다는 느낌. 그가 하는 말은 다 그랬던 것 같다. 목회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수 안 믿는 사람 예수 믿게 하고, 예수 믿는 사람 교회 잘 다니게 하고, 교회 잘 다니는 사람 헌신하게 하는 게 제 목회관입니다.”
더는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이 이상 무슨. 알고 보면 모든 목회자들의 삶이 이렇지 않은가.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 이 목사의 삶 또한 그랬다.
▲이 목사는 주변 개척교회에도 늘 관심을 기울인다. 일종의 책임감에서다. 그들에게 각종 전도용품과 생필품 등을 헌물한다. ⓒ김진영 기자 |
“그 땐 지금처럼 목회 자료도 별로 없었고 목회 환경도 좋지 않았죠. 교회도 작았을 뿐더러 기독교의 영향력도 아직은 미미했을 때니까요. 하지만 훌륭한 목회자는 그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들이죠. 여전히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기독교는 본질상 핍박과 함께 자라는 것 같아요. 핍박이 없으면 그 생명력을 잃는다는 말이죠. 교회가 커지고 목회 환경이 좋아지면서, 기독교의 크기는 커졌을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오히려 줄어든 것 같습니다.”
세월을 견딘 목자의 머리는 희끗했다. 그의 눈이 창밖을 향한다. “그래도 한국은 기독교에 빚졌어요.” 창 밖에 내려앉은 햇살에서 잠시 옛날을 본 것일까. 이 한 마디를 던지곤, 그는 잠깐의 침묵에 빠졌다. “어떤 빚 말입니까?” 기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한국의 민주주의, 현대식 교육과 의료제도, 여성들의 향상된 인권에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만큼 살 수 있는 건, 개인적으로 기독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의 역사를 기독교 없이 설명할 수 있습니까. 비록 지금, 기독교에 위기가 왔다고는 하나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주체 역시 전 기독교라고 생각해요. 과거, 교회가 극동 작은 나라의 새벽을 깨웠듯이 말이죠.”
극동 작은 나라…, 그러고 보니 한국은 참 초라했던 나라였다. 땅, 자원, 힘, 무엇하나 가진 게 없는. 그런 나라가 G20이라는, 국제적 회의를 개최한다. 그것도 의장국으로. 하나님의 축복일까. 누군가는 이 말에 발끈하겠지. 또 누군가는,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규정해선 안 된다고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믿고 싶다. 아니, 믿는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했고 앞으로도 함께 할 것입니다. 아멘.”
▲전통 한옥의 지붕을 본따 지어진 장석교회 건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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