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로, 우리 이웃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경우입니다.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때대로 우리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일에는 무관심하기 쉽습니다. 예수님도 당시 사람들의 무관심을 질책을 하면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11:17입니다.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우리 이웃에게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피리를 붑니다. 그러면 함께 즐거워하면서 춤을 추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또 우리 이웃에게 슬픈 일이 생겼습니다. 애곡합니다. 그러면 함께 울어주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일에 무관심하지 말고 관심을 기울여 주라는 것입니다. 물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시기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왜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왜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의 아우 요셉을 미워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습니까? 왜 사울 임금이 자기의 신하요, 자기의 사위였던 다윗을 미워해서 죽이려고 했습니까? 모든 것이 질투심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부패한 인간의 심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했습니다. 이웃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면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소하게 생각하면서 오히려 즐긴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친구 욥이 엄청난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욥을 위로해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저런 말로 욥을 책망하면서 오히려 욥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는 자로 함께 울어 주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종이에 빽빽하게 적은 것을 목사님에게 건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사실은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목사님과 교회를 위해서 제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그 교인이 주는 종이를 받아서 보았습니다. 그 종이에는 목사님이 고쳐야 할 것 50여 가지가 조목조목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을 읽고 나서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그리고 그저 한 마디만 나중에 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교인이 돌아가고 난 후 바로 그 자리에서 목사님은 사표를 썼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고서 그 교회를 떠나 버렸다고 합니다.

물론 그 목사님이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비판하면 그 사람이 쉽게 변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하기가 쉽습니다. 일할 의욕을 상실시키고, 좌절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웃에 즐거워하는 자가 있습니까? 함께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이웃에 우는 자가 있습니까? 함께 울어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내 입장에 맞추려고 하지 말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의 입장에 맞추어 주어야 합니다. 나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 줄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어떤 제자가 자기 스승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자야,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창밖을 내다보고 난 뒤에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어떤 아주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서 정답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또 제자에게 일렀습니다. "이번에는 거울 앞에 서거라. 그리고 거울 속을 들여다보아라. 누가 보이느냐?"
제자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스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님, 거울 속에는 제 모습만 크게 보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 스승은 제자에게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제자야, 똑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유리창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거울을 통해서는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기 모습만 볼 수 있겠느냐? 그것은 거울 뒤에는 은칠이 되어있기 때문이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 주기 위해서는 먼저 네 마음에 있는 은칠을 벗겨버려야 하느니라. 투명해져야지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단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편견의 은칠을 먼저 벗겨버려야 합니다. 내 감정의 은칠을 벗겨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쉽게 이해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너그럽고 여유로운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우리가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했을 경우입니다. 16절입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왜 모임이 자꾸 힘들어집니까? 서로의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서로 같이 해 보세요.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같이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문장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2)"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3)"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세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입니다.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는 것입니다.

왜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합니까? 그 배후에 교만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들어내고자 하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에 마음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생각을 우리가 떨쳐버려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교만은 천사를 마귀로 만들었다. 그러나 겸손은 사람을 천사로 만든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낮추며 겸손할 때, 우리는 천사와 같이 온화한 모습이 됩니다. 저절로 우리는 이웃과 더불어서 화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교만한 생각이 자리 잡게 되면 마귀처럼 되어 버리고 맙니다. 자연히 화목이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화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는 앞마당에서 수탉 몇 마리가 처절하게 싸움을 했습니다. 세력 다툼을 한 것입니다. 그 중 가장 힘이 세고 억센 놈이 승리를 했습니다. 이긴 수탉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울타리에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야! 세상에서 나보다 힘센 놈이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해!"

그러나 그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공중을 날고 있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서 그 수탉을 채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큰소리치는 사람, 잘난 척 하는 사람, 오래 가지 못하는 법입니다. 누가 그런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분위기가 깨지고 화평이 깨지는데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의 몸 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낮은 데 처해야 합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모두가 한 마음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렇게 불평을 합니다. "왜 세상이 이렇게 어두 컴컴하지?" 사실은 우리가 검은 색안경을 끼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것입니다. 안경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야 세상에도 소망이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마십시다. 누가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은 우리가 틀렸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부족하게 보입니까? 우리는 더 부족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인정할 때 우리는 어떤 모임에서라도 우리 자신을 낮출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 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그 모임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여러분 우리는 승리자입니다. 승자와 패자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십니까? 승자는 긍휼이 있을 때 승자입니다. 상대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패자입니다. 승자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자기를 버리고 저희들만 살겠다고 도망한 제자들..예수님을 향해 저주하고 침 뱉고 자기를 찌르는 그 못된 것들을 내려다보시면서 아이고 내 팔자야 하고 탄식을 하고 저주하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남편이 지지리도 속을 썩이는 술꾼에다 노름꾼인데 그 부인보고 예수 믿으라고 권해 보았느냐고 물었더니..그따위 인간 말종한테 예수 믿으라는 말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이구 내 팔자야 아마 죽어서도 지옥갈텐데 안 믿을 거니까 말도 안 꺼냈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불쌍해 보이고 사랑스럽게 보이고 전혀 미운 마음이 없어질 때가지 그 남편 절대 예수 안 믿을 거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그 부인은 마음에서 이미 실패하고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을 쓴 노만 필 박사는 미운 사람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첫째 미운사람의 장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합니다. 아무리 미운사람이라도 장점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읽고 그 사람의 장점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미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미운생각이 들면 들수록 더욱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기회가 있는 대로 직간접적으로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미운사람을 직접 간접으로 칭찬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얘기 할 때도 아~~그 사람 좋은 사람이다 하고 그 사람이 듣든 안 듣든 칭찬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그 사람을 대면 할 때는 미소띤 얼굴로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이며 숮불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승리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승리자에게는 관용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