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두 거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모두가 장애자였습니다. 한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고, 한 사람은 걷지 못하는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어쩔 수없이 걸식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한 움막에 기거하면서 서로 협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서 앉은뱅이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소경의 등에 업혀서 소경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거지가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매우 동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걸하러 올 때마다 자신들의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거지였고, 또 장애자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살림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조금씩 자기의 밥그릇에 슬쩍 슬쩍 옮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앉은뱅이는 배불리 얻어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두 거지는 구걸을 하기 위해서 움막을 나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매우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앉은뱅이는 그동안 잘 얻어먹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해서 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일순간 소경은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소경의 등에 업혀져 있던 앉은뱅이의 몸도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눈 위에 꽁꽁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때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협력하면서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서, 잔꾀를 부려서 그 행복은 산산이 깨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너'의 소중함을 무시했던 '나'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두 사람 모두의 죽음이라는 공멸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찍이 고대의 어떤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너' 없는 '나'가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는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지체들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불어서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경우를 우리에게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핍박을 당했을 경우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런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민요가운데 아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무슨 뜻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님이 나를 떠나려고 합니다. 갈테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트든지, 발목이 삐든지 해서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저주의 노래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반응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명하셨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눅10:5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평안은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일단은 그 가정에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그 가정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 그 가정에 복이 머물게 될 것이지만, 그 가정이 복이 받을 자격이 없으면 그 복은 복을 빈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원리를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면 그 저주는 그에게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할 까닭이 없으면 그 저주는 저주를 한 사람에게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경우에서도 남을 저주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주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농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아주 해로운 잡초의 씨앗을 구해서 그 농부의 밭에 왕창 뿌려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밭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번식력이 강한 잡초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바로 직후에 그는 그 농부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 딸에게 결혼선물로 그 밭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청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그 밭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그 해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두고 보라지, 잘 되는가 한번 보자!' 라는 말은 우리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늘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자기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참 심했습니다. 그의 상사는 아주 성질이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못하고 심하게 야단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상사가 보기 싫어서라도 회사를 그만 둘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친구로부터 좋은 조언을 얻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의 체험에서 터득한 하나의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을 때마다 그 상사를 축복해 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별것 아닌 일로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 분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의 마음에 평안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상사는 조금도 변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꾸중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그 상사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축복기도를 하는 그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꾸중을 들어도 상사가 미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상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상사를 대할 때도 언제나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그의 상사도 그를 대할 때 친절한 모습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애꿎은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축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우리를 핍박하던 사람도 결국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은 한 움막에 기거하면서 서로 협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고서 앉은뱅이의 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소경의 등에 업혀서 소경의 눈 역할을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두 거지가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서 그들을 매우 동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구걸하러 올 때마다 자신들의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거지였고, 또 장애자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그 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살림 자체가 그다지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두 거지에게 돌아오는 음식의 양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부렸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밥그릇에 있는 음식을 조금씩 자기의 밥그릇에 슬쩍 슬쩍 옮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앉은뱅이는 배불리 얻어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은 늘 허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도 휘몰아치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도 두 거지는 구걸을 하기 위해서 움막을 나왔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소경은 앉은뱅이를 등에 업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따라 매우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앉은뱅이는 그동안 잘 얻어먹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경은 제대로 얻어먹지를 못해서 몸이 약해질 때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일순간 소경은 현기증을 일으키더니 그 자리에서 푹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소경의 등에 업혀져 있던 앉은뱅이의 몸도 나동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다음날 두 사람은 눈 위에 꽁꽁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때 두 사람은 서로 더불어 협력하면서 나름대로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앉은뱅이의 마음속에 욕심이 생기면서, 잔꾀를 부려서 그 행복은 산산이 깨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너'의 소중함을 무시했던 '나'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두 사람 모두의 죽음이라는 공멸로 나타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찍이 고대의 어떤 철학자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나 혼자 살수는 없습니다. '너' 없는 '나'가 있을 수 없고, '나' 없는 '너'는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지체들을 소중히 생각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삶,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불어서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경우를 우리에게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핍박을 당했을 경우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살아가다 보면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물론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그런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나라 민요가운데 아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무슨 뜻입니까? 나를 사랑하는 님이 나를 떠나려고 합니다. 갈테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리도 못 가서 발이 부르트든지, 발목이 삐든지 해서 넘어지고 말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저주의 노래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심성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우리도 다 그렇게 반응 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명하셨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눅10:5입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평안은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일단은 그 가정에 복을 빌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그 가정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으면 그 가정에 복이 머물게 될 것이지만, 그 가정이 복이 받을 자격이 없으면 그 복은 복을 빈 사람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원리를 역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저주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면 그 저주는 그에게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저주를 받아야 할 까닭이 없으면 그 저주는 저주를 한 사람에게 되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경우에서도 남을 저주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주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됩니다.
미국에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웃집 농부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그래서 홧김에 아주 해로운 잡초의 씨앗을 구해서 그 농부의 밭에 왕창 뿌려버렸습니다. 순식간에 밭 전체를 뒤덮어버리는 번식력이 강한 잡초였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바로 직후에 그는 그 농부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 딸에게 결혼선물로 그 밭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청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그 밭에 있는 잡초를 뽑아내기 위해서 죽을 고생을 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을 저주하면 그 해가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를 말아야 합니다. '두고 보라지, 잘 되는가 한번 보자!' 라는 말은 우리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늘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직장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은 자기 상사 때문에 스트레스가 참 심했습니다. 그의 상사는 아주 성질이 까다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실수조차도 용납하지 못하고 심하게 야단을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상사가 보기 싫어서라도 회사를 그만 둘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 친구로부터 좋은 조언을 얻었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의 체험에서 터득한 하나의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을 때마다 그 상사를 축복해 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별것 아닌 일로 상사로부터 야단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 이 분에게 은총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분의 마음에 평안을 심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상사는 조금도 변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꾸중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그 상사를 위한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축복기도를 하는 그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꾸중을 들어도 상사가 미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상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상사를 대할 때도 언제나 밝고 상냥한 모습으로 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그의 상사도 그를 대할 때 친절한 모습으로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핍박하는 자리에 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애꿎은 핍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축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변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우리를 핍박하던 사람도 결국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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