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6하 원칙을 토대로 예배 철학의 틀을 형성하기 위한 질문들과 함께 예배의 철학적인 관점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흔히 6하 원칙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예배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 역시 이 6하 원칙의 질문을 토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성경에 기초한 답변을 할 수 있다면, 기독교 예배의 철학적인 관점의 기본 뼈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먼저 6하 원칙의 질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무엇일까? 솔직히 우리 삶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질문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다른 질문들이 의미 있게 해 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how(어떻게)’를 추구한다. 이것은 방법론적인 면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노하우(know-how)’를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질문이라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있어서 ‘노하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우대를 받는다. 그래서 이왕이면 초보자보다는 경력자가 더 우대를 받는 면이 많다.
과거 신학교 시절에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읽었던 책 중에 Dr. Leith Anderson이 쓴 『Leadership That Works』라는 책이 있었다. 그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how를 추구한다. 그래서 how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job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why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how를 추구하는 소위 노하우를 가진 사람)의 boss가 된다.”는 내용이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에 적극 동의를 표하고 싶다. 매우 의미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도 항상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이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how)”가 아니라, “왜 이 사역을 해야 하는가?(why)”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역하는 이유, 목적을 생각하게 해주며 동기를 부여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역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기초가 된다. 왜 사역을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이 단지 노하우를 통해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치 표류하는 배와 같을 수 있다. 목적지를 잃은 항해를 표류한다고 표현하듯이 목적을 상실한 사역의 기술은 우리 사역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배에 대한 다양한 면들을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예배의 철학적인 관점을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화려한 기술과 환경 속에 이루어지는 예배라 할지라도, 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무관한 종교적 행위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왜 우리는 예배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지난 세 번의 칼럼을 통해 이미 다루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왜 예배해야 하는지 기억하자.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사43:7,21의 말씀을 기억하자. 또한 엡1-3-14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깨달음과 고백을 기억하자.
또한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있다면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칼럼에서도 계속해서 6하 원칙의 질문들을 중심으로 예배의 철학적인 관점을 다루겠다.)
먼저 6하 원칙의 질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무엇일까? 솔직히 우리 삶의 기본 패턴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질문들이기 때문에 모두가 다 중요한 질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다른 질문들이 의미 있게 해 주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how(어떻게)’를 추구한다. 이것은 방법론적인 면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노하우(know-how)’를 중요시하는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질문이라 하겠다. 우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일에 있어서 ‘노하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우대를 받는다. 그래서 이왕이면 초보자보다는 경력자가 더 우대를 받는 면이 많다.
과거 신학교 시절에 리더십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 읽었던 책 중에 Dr. Leith Anderson이 쓴 『Leadership That Works』라는 책이 있었다. 그 내용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how를 추구한다. 그래서 how를 추구하는 사람은 언제나 job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why를 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how를 추구하는 소위 노하우를 가진 사람)의 boss가 된다.”는 내용이다. 저자의 이러한 언급에 적극 동의를 표하고 싶다. 매우 의미가 있는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도 항상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이 사역을 어떻게 할 것인가?(how)”가 아니라, “왜 이 사역을 해야 하는가?(why)”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역하는 이유, 목적을 생각하게 해주며 동기를 부여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사역에서 가장 선행되어야 하는 기초가 된다. 왜 사역을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없이 단지 노하우를 통해 어떻게 사역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마치 표류하는 배와 같을 수 있다. 목적지를 잃은 항해를 표류한다고 표현하듯이 목적을 상실한 사역의 기술은 우리 사역을 엉뚱한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배에 대한 다양한 면들을 생각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예배의 철학적인 관점을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는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화려한 기술과 환경 속에 이루어지는 예배라 할지라도, 그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와 무관한 종교적 행위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해 보자. “왜 우리는 예배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는 지난 세 번의 칼럼을 통해 이미 다루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왜 예배해야 하는지 기억하자.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사43:7,21의 말씀을 기억하자. 또한 엡1-3-14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깨달음과 고백을 기억하자.
또한 하나님이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분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자. 무엇보다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가 있다면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칼럼에서도 계속해서 6하 원칙의 질문들을 중심으로 예배의 철학적인 관점을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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