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미국 하와이의 정부 청사 앞에는 특이한 동상이 하나 서 있습니다. 동상의 얼굴이 흉측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어서 보기에도 끔찍한 모습입니다. 어떻게 공공장소에 그런 끔찍한 모습의 동상이 서 있을까? 이러한 의아심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동상 밑에 적혀 있는 글귀를 읽어보면 이해가 갑니다.

'성 따미엔. 1840∼1889.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 우리의 좋은 친구였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귀한 친구가 있을까?'

문둥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따미엔은 본시 벨기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대단한 갑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호의호식하면서 얼마든지 일평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물려준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혈혈단신으로 하와이 군도의 한 섬인 몰로카이로 건너갔습니다. 그 당시의 몰로카이 섬은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습니다. 문둥이들만 그 안에 모여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따미엔은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그곳으로 건너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몹시 순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저들의 마음에 소망을 심어줄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은 자나 깨나 그러한 생각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문둥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이러했습니다.

"흥, 자기야 몸이 성하니까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하지. 자기도 우리처럼 문둥병에 걸려서 날마다 몸이 썩어 들어가 봐! 어디에서 소망을 찾고, 어디에서 하나님을 찾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겠어!"

그 말을 들은 따미엔은 몹시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움막에 돌아와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들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저들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니 저에게도 문둥병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저를 위하여 그 귀하신 몸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물며 이 미천한 종이오리까! 그러니 저에게도 문둥병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는 마음의 결심을 굳혔습니다. 그는 문둥이의 고름 섞인 피를 자신의 몸에 수혈을 했습니다. 얼마가지 않아서 그의 몸도 감각이 무디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눈썹이 빠져나갔습니다. 손가락이 오그라들더니 그 마디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에게도 죽음의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문둥병에 걸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제가 저들 앞에서 '우리'라는 말을 떳떳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에게 문둥병을 허락해주신 것을 진실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나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문둥병이 걸린 우리들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모든 문둥이들은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따미엔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절망과 죽음의 섬이었던 몰로카이가 소망과 생명이 넘치는 섬으로 바뀌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앞에서 사랑으로 섬기는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고,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섬기고, 또 교회의 각 지체들을 섬긴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늘 형통하고 평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속상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핍박과 환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무방비상태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환난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근거를 세 가지로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12절 상반 절입니다.

둘째로, 우리에게는 기도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12절 하반 절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는 성도들의 돕는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에 처해 계십니까? 환난 앞에 소망을 가져다 놓으시기 바랍니다. 뒤에서는 기도로 뒷받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옆에는 성도들의 돕는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영화롭게 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입니다. 궁극적인 승리가 우리에게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은 결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12절 상반 절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우리 앞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즐거워하기에 얼마든지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6.25동란이 한창 치열할 때였습니다. 한번은 미 해병대 장병들 상당수가 갑자기 들이닥친 중공군에 의해서 포위를 당했습니다. 양 사방에서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미군 병사들의 시체가 여기저기에 널려 있습니다. 살아남은 병사들도 참호 속에 갇힌 채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곧 닥쳐올 죽음의 공포로 인해서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종군기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그 와중에서도 기자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떨고 있는 옆의 병사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일 이 시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당신은 어떤 요청을 하시겠습니까?" 그때 그 병사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Just give me tomorrow, 오직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

다행스럽게 그들은 포위망을 뚫고서 극적으로 살아났습니다. 훗날 그 기자는 똑같은 제목의 기사를 써서 언론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퓰리처상을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내일이 보장된다면 얼마든지 오늘의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3:12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소망이 있는 자는 담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평안북도 선천군에 가물남교회라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담임하셨던 이성주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앞서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공산당에 의해서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졌습니다.
공산당의 간부들은 목사님의 마음을 돌이켜서 그를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씩 그를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일해보니까 어떻소? 당신은 바보요. 그까짓 목사를 해서 무슨 소망이 있겠소? 그러지 말고 우리와 손잡고 공산주의나 합시다." 그럴 때마다 이성주 목사님은 담대하게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물론 내 소망이야 크지요. 내 소망은 나팔 통과 같지요. 오히려 당신들에게는 소망이 없지요. 당신들의 소망이야 보습 끝과 같소."

보습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쟁기를 의미합니다 위는 넓지만 내려갈수록 좁아집니다. 그리고 끝은 뾰족합니다. 반대로 나팔 통은 처음에는 가늘지만 갈수록 굵어지고 넓어집니다. 이성주 목사님은 서슬 푸른 공산당 간부들 앞에서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담대하게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학교를 졸업하고서는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지요. 그때만 해도 당신들의 소망은 컸을 것이요.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사십이 되고, 오십이 되고, 육십이 되면 당신들의 소망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소. 그러다가 죽으면 그 소망마저도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요. 그러나 내 소망은 다르오. 내 소망은 예수를 믿는 소망인데, 이 소망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 더 커지고 넓어진다오. 따라서 당신들의 소망은 보습 끝과 같고, 내 소망은 나팔 통과 같지 않소? 그러니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나와 더불어서 예수님을 믿으십시다."

끝내 그들은 이성주 목사님의 마음을 돌이켜 놓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그를 총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성주 목사님의 눈앞에는 소망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나팔 통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환난 넘어 있는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롬8:18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또 롬8:28의 말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분명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환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활기차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