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참으로 좋은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사랑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 그리고 느끼게 해주고 또 사랑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한국식 사고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표현하는 기성 세대인 부모님들과 여기서 태어나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들간에는 사랑의 표현과 방법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언어가 다르고 생활 풍습이 다른 세대간에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어쩌면 너무나 아름다운 일인데, 그 두 세대간에 느끼는 차이와 그 감각때문에 생기는 오해는 우리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 때가 종종 있다.

나이 드신 부모님들은 부모님들이 경험했고, 감각되어졌던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 감정이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대화 없이 엄격하게 교육받았던 부모님들 중에는 자기가 경험했던, 어쩌다 한번 눈길 주고받고, 한번 진하게 느껴졌던 사랑의 정감을 잊지 못한 채, 그 방법대로 자녀를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도 그러한 부모로 받아들여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분들이 있다. 그러나 기대는 한순간이고 자녀들과 격돌되어지는 감정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버리고 만다. 왜 그런가? 우리 부모님들이 원하는 방식은 자녀들이 현세대에서 익숙해 있는 방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옛날 어른들은 눈길만 주고받아도, 언어가 없어도 '아하, 우리 부모님이 날 사랑하시는구나'하며 그냥 가슴에 품은 채 넘어갔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어떠한가? 말을 안해주면 의심하기 시작하고, 사랑의 접촉이 없으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쉽게 결론을 내려버린다.

언젠가 주일학교 성경공부 시간에 사랑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다가 한 아이의 입에서 톡 튀어나온 말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서로 사랑 안해요. 난 엄마 아빠가 한번도 우리 앞에서 뽀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 어린아이의 사랑의 척도는 뽀뽀였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 남녀들은 어떠한가? 어느 한쪽이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전에는 속으로 '이 사람이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사랑한다는 거야 뭐야?'하며 한참 재고 있게 된다. 말로 표현되어지는 언어가 사랑의 척도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우리 생각은 각기 다르다. 그 생각은 자기 성격과 성품과 경향성을 띠고 있고, 그렇게 형성된 자기 자신들의 틀로 사람들은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견해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천태만상인 것이다. 이쪽에서는 접수되는 일도 저쪽에서는 거절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실한 원칙이 필요하다. 좋은 보기가 필요하고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어 개념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그 범주 안에서 적어도 서로가 상처받지 않는 한계에서 오고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세울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랑의 개념의 원리를 늘 변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생각과 철학에서 찾기보다는 변치않는 성경에서 찾고 싶다. 바야흐로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부모된 사람으로서 귀를 기울이고 배워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사랑의 표현 방법의 무지에서 벗어나 쓸데없는 비생산적인 오해는 하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고린도전서 13장은 매번 결혼식장에 가면 듣는 말씀이다. 그렇게 수십 번 들어도 듣는 것만큼 실천이 안 되는 것도 그 말씀이다. 13장은 전체가 짧게 끝맺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심도 있는 사랑의 강좌는 현재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에게는 자녀 사랑법의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다.

먼저, 우리가 자녀를 사랑하는 사랑은 첫째, 오래 참고 온유해야 한다.

여기서 오래 참는 것과 온유한 것은 어찌 보면 같은 말 같으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온유란 오래 참음으로 해서 생기는 하나의 열매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번번이 아이들을 야단치는 것을 보면 나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절실히 느낀다. 좀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한참 야단을 치다가도 스스로에게 언뜻 반문할 때도 있다. "Am I doing all right?"자식을 키우다 보면 화가 치솟는 일도 또 속이 푹푹 썩는 일도 많은데, 그때마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통제하지 못해서 폭발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녀들에게 교훈보다는 깊은 상처가 생길 것이고 책망하며 바르게 함보다는 아예 싹을 죽여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 거기에는 존경과 감사보다는 원망과 가슴속의 시퍼런 멍자국만 가득하게 된다. 부모들이여, 자신을 통제하는 것을 잊지 맙시다.

둘째,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에는 투기, 자랑, 교만이 없어야 한다.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특별히 잘 생겨서, 예뻐서, 공부를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 자체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어야 한다. 투기와 자랑, 교만은 같은 부류로 묶어 생각할 때 그 근거가 이기심임을 볼 수 있다. 남의 집 자녀와 비교해서 "누구누구는 잘하는데 넌 뭐야?" "네 친구 누구는 좋은 학교에 들어갔는데 넌 이게 뭐니?"라고 말한다. 내 자녀가 남보다 뛰어나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모두들 같겠지만, 자기 욕심을 못 견디어 남의 자녀가 잘 되는 것을 투기하거나 혹은 자식 자랑을 한바탕 하고 싶은데 못하게 된 좌절된 꿈을 폭발해 버림으로 자녀를 구박하거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보다는 의기소침한 어린 영혼에게 용기와 재도전의 소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안식과 쉼이 있는 사랑의 포옹과 격려는 미래에 더 없는 훌륭한 인물로 자라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셋째, 무례히 행치 말아야 한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내 뱃속을 통해 나온 자식이라도 할 말이 있고 안할 말, 못할 말이 있다. 자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은 그 자녀의 인격에 손상을 주며, 부모 자식간의 거리만 넓힐 뿐이다. 부모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자녀에게 온갖 추태를 다 보이고 그 자식에게서 존경과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직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의 원리만 있을 뿐이다. 자녀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녀의 말을 잘 경청해 주는 태도가 수반되어야 한다. 학교에 갔다 와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싶은데 조금만 얘기하려 하면 "골치 아프니까 말시키지 마!" "빨리 가서 숙제나 해라"고 한다거나, 부모의 의견을 묻는데 "몰라, 네가 알아서 해!"하고 무관심하게 내던져 버린다면, 그 아이는 다음부터는 결코 얘기하지도 묻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 자녀들이 이야기를 할 때 잘 들어주고 "그래서 어떻게 됐니?"하는 식의 유도적이며 흥미를 돋우어주는 태도를 보여주어야겠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 일을 통해 넌 뭘 느꼈지?"등등.
서로간의 예의를 갖춘 아름다운 대화가 되도록 신경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