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 사업가로서 자선사업을 많이 했던 앤드류 카네기의 일화입니다. 흔히들 그를 가리켜서 강철 왕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철강의 제조에 관련해서는 별반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단지 그는 많은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그들을 통해서 철강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 회사에서 철강 제련 기술이 가장 뛰어난 기술자 한 사람을 자기 방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일렀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우리 회사에서 가장 훌륭한 기술자임에 틀림이 없네. 그래서 내가 자네를 지금 공석중인 우리 회사의 사장으로 임명하려고 하네. 그러니 자네가 그 자리를 맡아서 충성을 다해 주게나." 그러자 그 기술자는 가만히 생각하더니 정중하게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회장님, 회장님의 호의는 무척이나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 자리에 적임자라고 생각되지를 않습니다. 저는 회사의 경영에 대해서 전연 아는 바가 없는 문외한이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의 호의가 고맙지마는 저는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카네기는 의외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타일렀습니다. "여보게, 회사의 경영이라는 것은 차츰 배워 나가면 되지 않겠나? 그러니 자네가 그 자리를 좀 맡아주게나." 그러자 그 기술자는 다시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회장님!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다고 봅니다.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압니다. 저의 재능은 기술이지 경영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재능대로 회장님을 섬기며, 회사를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네기는 그의 말을 듣고서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술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알겠네. 내가 자네 뜻대로 하겠네. 그 대신 자네가 나와 한 가지 약속을 해 주어야 할 것이 있네. 자네는 명실 공히 철강계의 대통령임에 분명하네. 그러니 이제부터는 내가 자네에게 대통령과 맞먹는 급료를 지불하겠네. 그 한 가지만큼은 자네가 거절하지 말았으면 좋겠네."
그 후 카네기는 약속대로 그 기술자에게 대통령과 맞먹는 급료를 계속해서 지불하였습니다. 물론 그 기술자도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가 맡은 소임에 더욱 충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에 고무되어서 회사의 전 직원은 자신이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카네기 철강회사는 명실 공히 세계에서 제일가는 철강회사로 발돋움할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모든 일에 이와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그 분야의 전문가, 그 분야의 리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크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길 때도 같은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해야 합니다. 각자의 재능이 다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은사도 다르게 마련입니다.

여러분, 재능과 은사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한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선천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타고난 재능입니다. 재능은 믿지 않는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서 전에는 노래를 잘 안하던 사람이 기쁨으로 성가대에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은사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재능과 은사가 일치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은사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도록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을 때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영적인 선물을 가리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적합한 은사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은사를 가지고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직분을 주십니다. 그냥 직분만 주시지 않고, 그 직분을 효율적으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사도 함께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수의 일을 맡겼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에게 맨손으로 일하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십니다. 목수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연장도 함께 주십니다. 톱도 주시고, 대패도 함께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연장이 바로 은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우리는 그 은사를 소중히 여기면서 받은 은사대로 맡은바 소임에 헌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은사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은사는 다양 하다는 것입니다. 여러 개의 은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은사라도 우리가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며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통해서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써 은사를 주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될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은사는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상반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각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큰 선물 보따리 하나를 주셨습니다. 그 선물 보따리의 이름은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보따리를 풀어 보니까, 그 속에는 각종 작은 선물상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물상자에는 몸 된 교회를 이루는 지체들, 곧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 작은 선물 상자의 이름이 곧 몸된 교회의 성도에게 주시는 은사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구체적인 실례로서 오늘 본문에서 일곱 가지 은사를 열거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은사는 6절 하반부에 있는 예언입니다. 흔히 예언이라고 하면 미래를 앞당겨서 말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적인 의미와 전연 관련이 없습니다. 미래의 일이든지, 현재의 일이든지, 과거의 일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 바로 예언입니다. 따라서 이 예언은 설교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둘째 은사는 7절에 있는 섬기는 일입니다. 봉사의 은사입니다. 영어의 deacon, 곧 집사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시간과 물질과 몸으로 교회를 섬기는 집사들에게 주어진 은사입니다.

셋째 은사는 7절 하반부에 있는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책이 따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교사 역할이 그만큼 소중했습니다.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은사가 바로 가르치는 일입니다.

넷째 은사는 8절에 있는 권위 하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지체들을 찾아가서 말씀과 기도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오늘날의 권사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이 은사의 특징은 관용입니다.

다섯째 은사는 구제하는 일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습니다. 고후8장을 보면 마게도냐 교회들의 성도들이 그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근도 많았고 핍박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구제의 은사가 절실하게 요청되었을 것입니다.

여섯째 은사는 다스리는 일입니다. 다스릴 治, 그러니까 영어로는 Gift of Leadership- 이 은사의 특징은 부지런함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퓨데라는 단어를 쓰는데 여기서-스피드란 뜻이 나왔습니다.다스리는 은사를 가진 사람의 특징은 시간을 효율성 있게 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기를 좋아 합니다.

마지막 일곱째 은사는 긍휼을 베푸는 일입니다. 예컨대 가버나움에 한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의 종이 중풍 병에 걸렸습니다. 드러누워서 꼼짝도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백부장의 마음은 몹시 아팠습니다. 때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찾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백부장은 자기 하인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손수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긍휼의 은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일곱 가지의 은사들을 열거했습니다. 그런데 고전12장에는 은사들이 아홉 가지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은사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은사는 이외에도 얼마든지 더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는 의도는 몇 가지 은사가 존재 한다는 것이 아니라..그만큼 은사가 다양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당나귀가 밖에서 열심히 일하고서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때마침 그 집의 강아지가 주인의 무릎에 앉아서 재롱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당나귀는 샘이 났습니다. 자기는 뼈 빠지게 일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강아지는 일도 하지 않고 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자기도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주인은 마당에 홀로 앉아서 한가하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틈을 놓칠세라 당나귀는 주인에게로 얼른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자기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그 육중한 몸을 날려서 주인의 무릎 위로 껑충 뛰어올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련한 당나귀는 영문도 모른 채 그 날 주인에게 죽도록 얻어맞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괜스레 다른 사람의 은사를 흉내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 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