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박 선교사(28)가 지난 2월 7일(이하 한국 시각) 미국으로 귀환한 이래 처음으로 언론에서 북한과 관련해 언급했다. 미국 크리스채너티투데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 선교사는 그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 온 이유부터 지난 입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 북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현재의 희망에 대해서도 밝혔다.
박 선교사는 작년 성탄절 전야인 12월 24일에 자진입북하자마자 체포되어 6주간의 구금 끝에 풀려났다.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를 받아온 그는 31일 전화 통화로 진행된 이 인터뷰에도 애리조나 주 투싼에 위치한 한 병원에서 임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그동안 공개석상에서 북한과 관련해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지난 1월 25일 역시 자진입북한 지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31)의 신변에 위협이 갈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고 밝혔다. 박 선교사는 “그가 안전해질 때까지는 북한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27일 보스턴 출신의 말리 씨가 그의 석방을 위해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귀환한지 며칠 뒤에 이뤄졌다. 말리 씨의 석방에 대해 박 선교사는 “기도가 응답됐다”고 안도감을 드러냈다.
“北 위한 연합된 운동 있었다면 입북 안했을 것”
이어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 선교사는 북한을 떠나온 후 자신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정신병원들을 출입했고 이는 매우 힘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 북한의 상황이 얼마나 악랄한지 그 어느 때보다 잘 알게 됐다”며 “누구라도 거기 있어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보고, 모든 악을 목도한 후 서구 세계로 돌아와 환영하는 사람들 속에 있게 되면 이는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 생각으로 너무나 괴롭다”고 밝혔다.
입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만난 북한 난민들을 통해 “북한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북한 난민들이 가족들이 걱정돼서 북한에 돌아가기 원했다. 그들은 매우 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정권은 선과 악의 개념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입북으로 “인권단체들이 북한을 바꾸는 거대한 운동을 위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보기 원했다”며 “이런 거대한 운동이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처럼 입북하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며, “나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간 것이 아니였으며”, 단지 “희생을 통해서 회개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여서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을 원했었다”고 밝혔다.
북한 정권 하에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을 “홀로코스트 이래 가장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대학살”이라고 표현한 그는,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인권단체들이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을 위한 운동에 있어) 하나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북한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난민들 돕는 것”
박 선교사는 21세 때 기독교인이 됐고 2007년 선교사가 됐다. 그는 자신이 북한을 떠날 당시 “매우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잠언 31:8-9과 시편 82:2-4을 통해 다시금 기운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모두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구하라는 구절들이다.
그는 교회들에 “내 소망과 희망과 기도는 교회가 일어나 해방을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서는 것”이라고 전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북한을 돕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북한 난민들과 북한 난민들을 돕는 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선교사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에 어떻게 돈을 보내는지, 흩어진 가족들을 어떻게 다시 만나게 하는지,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곳에 어떻게 음식을 보내는지 이것들은 북한 사람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들의 고향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북한의 해방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박 선교사는 작년 성탄절 전야인 12월 24일에 자진입북하자마자 체포되어 6주간의 구금 끝에 풀려났다. 이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치료를 받아온 그는 31일 전화 통화로 진행된 이 인터뷰에도 애리조나 주 투싼에 위치한 한 병원에서 임했다.
그는 먼저 자신이 그동안 공개석상에서 북한과 관련해 입을 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지난 1월 25일 역시 자진입북한 지인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31)의 신변에 위협이 갈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고 밝혔다. 박 선교사는 “그가 안전해질 때까지는 북한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27일 보스턴 출신의 말리 씨가 그의 석방을 위해 방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함께 미국으로 귀환한지 며칠 뒤에 이뤄졌다. 말리 씨의 석방에 대해 박 선교사는 “기도가 응답됐다”고 안도감을 드러냈다.
“北 위한 연합된 운동 있었다면 입북 안했을 것”
이어 진행된 인터뷰에서 박 선교사는 북한을 떠나온 후 자신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다. 정신병원들을 출입했고 이는 매우 힘들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 북한의 상황이 얼마나 악랄한지 그 어느 때보다 잘 알게 됐다”며 “누구라도 거기 있어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다 보고, 모든 악을 목도한 후 서구 세계로 돌아와 환영하는 사람들 속에 있게 되면 이는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있는 사람들 생각으로 너무나 괴롭다”고 밝혔다.
입북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만난 북한 난민들을 통해 “북한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많은 북한 난민들이 가족들이 걱정돼서 북한에 돌아가기 원했다. 그들은 매우 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정권은 선과 악의 개념을 상실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입북으로 “인권단체들이 북한을 바꾸는 거대한 운동을 위해 하나로 연합하는 것을 보기 원했다”며 “이런 거대한 운동이 이미 이뤄지고 있었다면 절대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자신처럼 입북하는 것을 원치도 않는다며, “나 자신이 북한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들어간 것이 아니였으며”, 단지 “희생을 통해서 회개가 일어나고 사람들이 모여서 북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을 원했었다”고 밝혔다.
북한 정권 하에 자행되고 있는 인권 유린을 “홀로코스트 이래 가장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대학살”이라고 표현한 그는,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인권단체들이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을 위한 운동에 있어) 하나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북한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난민들 돕는 것”
박 선교사는 21세 때 기독교인이 됐고 2007년 선교사가 됐다. 그는 자신이 북한을 떠날 당시 “매우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잠언 31:8-9과 시편 82:2-4을 통해 다시금 기운을 회복했다고 말했다. 모두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구하라는 구절들이다.
그는 교회들에 “내 소망과 희망과 기도는 교회가 일어나 해방을 위한 운동의 선봉에 서는 것”이라고 전했으며, 기독교인들에게도 북한을 돕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북한 난민들과 북한 난민들을 돕는 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선교사는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에 어떻게 돈을 보내는지, 흩어진 가족들을 어떻게 다시 만나게 하는지,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곳에 어떻게 음식을 보내는지 이것들은 북한 사람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들의 고향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북한의 해방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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