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새로운 로마서의 단락으로 들어갑니다. 크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진데서 이제 마지막 섬김에 관한 단락입니다. 이 부분은 1장서 11장까지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교리적인 부분을 다루었다면 12장부터는 실제적인 삶에 관한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믿는 모습이 나타나야 하는가? 건전한 신앙관을 가졌다면 건전한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전체 주제라고 했는데 이 하나님의 의를 왜 얻어야 하는가? 어떻게 얻는가? 얻었다면 어떠한 위치가 되는가? 성령과 성도와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예정과 성도의 견인과의 관계 율법을 떠난 하나님의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성 이러한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교리들을 우리는 공부를 했습니다.

바울은 이제 12장에서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이제 그러므로라는 말을 잘 이해하면 로마서 전체를 이해 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에는 중요한 획을 긋는 역할의 그러므로 라는 말이 4번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그러므로는 마다 아주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죄에 대해서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구원에 대해서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구원의 견인에 대해서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섬김에 대해서

그러므로라는 말을 로마서에서 잘 이해를 한다면 중요한 것은 다 이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은 그러므로의 삶을 산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받은바 은혜를 헛되이 버리지 아니한 것입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예전에 받았던 은혜는 다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습니다. 내가 언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했는가 하고 의심합니다. 그럴 때마다 옛날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가 보아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뽕나무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했던 삭개오는 믿음의 열심히 약해질 때면 그 뽕나무를 찾아가 그대를 회상하며 그 나무에 입 맞추며 주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실패한 신앙의 사람은 그러므로의 삶을 살지 않고 그러나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로마서 12장은 바로 전장의 내용을 어떻게 삶에 적용하는가? 그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로 나타나는 게 아니고 바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바로 우리와 세상의 관계가운데 나타납니다.
이 믿음은 바로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이 믿음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고, 심지어는 우리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 원수들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며, 우리를 다스리는 정부와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과의 모습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야 하는 것입니다.

자 이런 다양한 관계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그 첫 번째는 바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가에 대해서 알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관계를 이루는 그 관계를 지속하는 근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왜냐하면 (롬 12:2)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기 대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어떤 마술과 같이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공식이 아닙니다. 물론 감정이나 느낌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깨답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 원리는 헌신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면 먼저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은 먼저 헌신한사람에게 뜻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먼저 순종할 준비를 하고 먼저 자신을 쓰임 받도록 준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먼저 주여 당신의 뜻을 보여주소서! 그러면 제가 생각해 보고 결정 하겠나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의 뜻이라면 행하겠나이다 하는 결단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러한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1절에 바울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때문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죄악에 있을 때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은혜로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하심으로 지금도 날마다 용서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드리는 자세는 바로 자발적인 헌신의 자세입니다.

기꺼이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할 수 없이 하는 헌신이 아닙니다. 외식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나의 시간, 재능, 재물~~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뜻대로 쓰시옵소서 하는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헌신은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관념적인 헌신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마음만 드리면 되지 그렇게 생각 합니다. 여러분 마음을 드린다는 것-그것은 자칫 입으로만 드린다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가 있습니다.

제가 제일 처음에 안수를 받던 교단이 Regular Baptist였습니다. 참 보수적이고 경건한 신학을 가진 교단입니다. 제가 그때 개척을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 교단 본부에 연락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Regular Baptist최초 한인 교회를 세운다면 어떠한 도움을 줄 수가 있느냐? 그랬더니 그 교단 책임자( 총회장)가 하시는 말씀이,“ 물질적으로는 도와 줄 수 없지만 도덕적으로는 도와주겠다” 이렇게 말합니다. 영어로는 Moral Support 개척교회에 무슨 도덕적 지원이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그 말은 바로 도움을 줄 수가 없다는 말을 공손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가 있습니다. 기도해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아직 하기 싫습니다 못합니다의 완곡한 표현으로 쓰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겠습니다 약속하지 말고 되도록이면 그 자리에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되도록 그럽니다. 우리의 헌신을 형식적이나 외식적이 아닌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헌신은 자발적이고 실제적이면서도 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헌신이 이루어 질대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 이 말은 본문에 바로 산제사로 드리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100% 우리 자신을 드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전부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전부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반'만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 반 사랑하고, 주님 반 사랑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 반 사랑하고 또 다른 사람을 반 사랑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전부를 말합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전부를 주셨듯이, 우리도 주님께 전부를 드린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반 드리고 주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2/3를 드리고 사랑이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전부를 기대하십니다. 그 전부의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란 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온전히 드려지는 그런 제사를 말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님, 주님과 동행하기 원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으로 오리엔트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 은혜로 시작하길 원합니다." 이 사람은 주님의 은혜로 '오리엔트'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00% 주님에게 오리엔테이션 되어 있는 드려진 생애입니다. 첫째 원리는 바로 자발적이고 실제적이며 온전한 헌신의 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