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중요한 자원은 역시 재원이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경제제일주의는 아니더라도 선교사역에는 많은 경비가 필요하다.
바울이 헌금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한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처럼, 선교의 참여가 재정적 헌신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로마를 지나 스페인으로 가려는 비전을 피력했다. 이때 로마 성도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했다.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롬 15:24 하)로마서 10장 15절에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는데, 물론 이 말은 물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먼저 생각되는 것이 재정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선교사가 파송되려면 적어도 생활비, 사역비, 사업비가 필요하다. 단지 생활비만 겨우 만들어 파송한다면 선교사들은 먹고 살다가 그만둘 것이다. 일을 하려면 늘 재정적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사 파송에서 교회의 중요한 역할은 선교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비'를 교회 재정의 제1순위로 두는 교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회 주보를 훑어보면 선교비 항목은 맨 밑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그 액수도 미미하다. 이것을 봐도 교회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소위 'IMF 시대'라고 불리는 경제파동이 있었던 1997년의 이야기이다. 이때 많은 교회들이 선교비를 중단하거나 줄였다. 그리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했던 일을 기억한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우선 보이지 않는 지출부터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교를 교회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거나,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으로 적당하게 생각한다면 선교사들은 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목숨이 교회의 지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 교회의 선교 참여율이 15%를 밑돌고 있다. 한국 교회 모두 선교에 참여해야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도시교회, 지방교회, 농촌교회 구분이 없어야 한다. 선교는 큰 교회의 전용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서규석 목사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70년대 말 전남 목포 근교에 삼향면 왕산리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의 작은 교회에 부임하면서 농촌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하였다. 지금은 목포시에서 가까워졌지만 예전에는 아주 가난한 마을에 불과했다. 그곳에 세워진 삼향교회는 약사는 오래되었지만 워낙 가난해 목회자가 남아나지 못했다. 서규석 목사는 서울에서 자라 고생이란 것을 알지 못했지만 '농촌교회는 생각이 달라져야 산다'는 사명을 가지고 농촌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자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 그는 매주 "농촌교회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라고 외쳤다. 시간은 걸렸지만 그가 외치는 메시지는 먹혀 들어갔다. 선교교육을 했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는 교회로 만들었다. 저들은 점차 받는 자세에서 주는 자세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저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그곳에는 선교센터가 세워졌고 선교사를 필리핀, 인도 등지에 파송했으며 고아원, 병원, 훈련원 등을 세워 가면서 힘 있게 선교하는 시골교회로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선교는 엄밀하게 말해 재정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선교적 마음만 있으면 한국의 섬에 있는 교회든, 시골교회이든 주는 교회로 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선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는 사람은 가난하게 될 것이고, 부자라고 믿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선교하다가 망한 교회가 있는가? 선교하다가 망한 나라가 있는가? 부유하기 때문에 선교한 교회나 나라가 아니라 선교하기 때문에 부유해진 나라가 된 것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고 자랑하고 있다. 저들의 환난과 가난이 신앙의 풍성함을 가져다 준 결과가 되었다. 신앙의 풍성함은 풍성한 헌금을 만들어 바울의 사역을 도운 것을 말한다. 결국 헌금의 문제는 믿음과 헌신일 뿐이지 물질의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다. 바울이 거둔 모든 헌금이 철저하게 복음 전파를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교회 헌금이 무엇을 위해 쓰여지고 있는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하겠다.
바울이 헌금에 대해 여러 번 강조한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것처럼, 선교의 참여가 재정적 헌신 없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로마를 지나 스페인으로 가려는 비전을 피력했다. 이때 로마 성도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요청했다. "너희의 그리로 보내 줌을 바람이라"(롬 15:24 하)로마서 10장 15절에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라고 했는데, 물론 이 말은 물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먼저 생각되는 것이 재정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선교사가 파송되려면 적어도 생활비, 사역비, 사업비가 필요하다. 단지 생활비만 겨우 만들어 파송한다면 선교사들은 먹고 살다가 그만둘 것이다. 일을 하려면 늘 재정적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교사 파송에서 교회의 중요한 역할은 선교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비'를 교회 재정의 제1순위로 두는 교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교회 주보를 훑어보면 선교비 항목은 맨 밑에 놓여 있을 뿐 아니라 그 액수도 미미하다. 이것을 봐도 교회의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소위 'IMF 시대'라고 불리는 경제파동이 있었던 1997년의 이야기이다. 이때 많은 교회들이 선교비를 중단하거나 줄였다. 그리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했던 일을 기억한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우선 보이지 않는 지출부터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선교를 교회의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거나,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으로 적당하게 생각한다면 선교사들은 황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목숨이 교회의 지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한국 교회의 선교 참여율이 15%를 밑돌고 있다. 한국 교회 모두 선교에 참여해야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도시교회, 지방교회, 농촌교회 구분이 없어야 한다. 선교는 큰 교회의 전용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하는 친구, 서규석 목사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970년대 말 전남 목포 근교에 삼향면 왕산리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의 작은 교회에 부임하면서 농촌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하였다. 지금은 목포시에서 가까워졌지만 예전에는 아주 가난한 마을에 불과했다. 그곳에 세워진 삼향교회는 약사는 오래되었지만 워낙 가난해 목회자가 남아나지 못했다. 서규석 목사는 서울에서 자라 고생이란 것을 알지 못했지만 '농촌교회는 생각이 달라져야 산다'는 사명을 가지고 농촌으로 온 것이었다. 그는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지면 자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처음 그는 매주 "농촌교회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라고 외쳤다. 시간은 걸렸지만 그가 외치는 메시지는 먹혀 들어갔다. 선교교육을 했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주는 교회로 만들었다. 저들은 점차 받는 자세에서 주는 자세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후 저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 그곳에는 선교센터가 세워졌고 선교사를 필리핀, 인도 등지에 파송했으며 고아원, 병원, 훈련원 등을 세워 가면서 힘 있게 선교하는 시골교회로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선교는 엄밀하게 말해 재정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선교적 마음만 있으면 한국의 섬에 있는 교회든, 시골교회이든 주는 교회로 변할 수 있고, 얼마든지 선교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본다. 자신이 가난하다고 믿는 사람은 가난하게 될 것이고, 부자라고 믿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선교하다가 망한 교회가 있는가? 선교하다가 망한 나라가 있는가? 부유하기 때문에 선교한 교회나 나라가 아니라 선교하기 때문에 부유해진 나라가 된 것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고 자랑하고 있다. 저들의 환난과 가난이 신앙의 풍성함을 가져다 준 결과가 되었다. 신앙의 풍성함은 풍성한 헌금을 만들어 바울의 사역을 도운 것을 말한다. 결국 헌금의 문제는 믿음과 헌신일 뿐이지 물질의 많고 적음의 문제는 아니다. 바울이 거둔 모든 헌금이 철저하게 복음 전파를 위해 쓰여졌다는 것은 교회 헌금이 무엇을 위해 쓰여지고 있는가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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