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나단 에드워드가 활약한 노스햄튼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노스필드(Northfield)는 세계적 부흥사 디.엘 무디의 고향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세기를 격하여 불과 수십마일 상관 지역에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신 것이다.(1837)

디.엘 무디의 주 사역지는 시카고이기는 하였지만 뉴잉글랜지방 특히 매샤추세츠에 끼친 그의 영적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무디가 4살 되던 해에 아내와 7남매, 그리고 빚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자연히 무디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생계를 돕기 위해 농사일을 해야만 했다. 그의 생가(生家)가 있는 노스필드는 아직도 한적한 농촌으로 남아있다. 대부흥사 무디의 생가 치고는 너무도 방치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허름하였다. 그 옆에 마련된 무디 부부의 묘 역시 초촐하기 그지없었고 한 여름의 무심한 구름만 흘러가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후배목사가 묘앞에 드러누워 자신도 무디처럼 이름을 남기고 이렇게 누워서 순례객을 맞고 싶다면서 사진을 찍었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무디는 17세 때,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와 메사추세츠의 클린톤에서 신문 배달을 거쳐 보스턴에 있는 삼촌의 구두 가게에서 구두 수선 일을 하였다.

그때 (1855년 4월 21일) 저 유명한 보스턴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던 에드워드 킴볼이 그를 찾아와 복음을 전하고 그는 그 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곧장 구령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하루동안 한 명 이상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결코 잠자리에 들지 않는 열정적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거듭난 지 1년 후 무디는 시카고로 가서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한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했다. 처음 16명에 불과하던 주일학교가 그로 말미암아 몇 년만에 1,000여 명이 모일만큼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고 그가 전도의 은사를 확신한 후 1860년부터는 사업을 정리하고 복음 전도에 전력하였고 자연스럽게 평신도 설교자로 세움을 받았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링컨의 노예 폐지론을 지지하며 전쟁터로 달려간 무디는 군인 교회에서 1,500여 차례 집회를 가졌고, 매번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동안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867년 무디는 영국을 최초로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죠지 뮬러, 찰스 스펄전과 교유하게 된다. 비록 무디는 스펄전과 같은 학문은 없었지만 성경을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하고 모든 설교의 중심을 성경에 두게 되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면 성경을 공부하는 성경학자가 되었다.

1871년 '시카고 대화재' 사건은 그의 사역에 있어 또 한번의 대전기를 이루었고 1873년 영국을 다시 방문하여 3년간이나 자비량으로 전국 전도여행을 다녔으며 요한 웨슬레 이후 영국에서 복음을 전한 최대의 전도자가 된다. 1876년 미국에 다시돌아와 1881년까지 전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무디는 그의 생애를 통해 2억이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한다. 무디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컬컬한 목소리와 많은 문법적 오류 등 설교에도 결함이 많았지만, 그는 평생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도구로 쓰셔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심령들을 건지셨다. 그는 1899년 12월 22일 세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가 말년에 그의 고향에 세운 두 학교중 생가 옆에 있는 학교는 문을 닫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은 훌륭한 강당에는 오래된 파이프 오르간이 놓여 있었다. 무디가 복음의 사자후를 토했을 그 연단에 나도 서서 복음을 외치는 모습으로 기념촬영을 한후 적막한 노스필드를 뒤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