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소그룹 모임을 하면서 장차 가장 하고 싶은 일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점점 차례가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그 때 국제통상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학군단 생활을 하고 있었고,
제대 후에 신학교를 들어가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던 때였다. 신학인지, 목회인지, 전문인 선교인지 확실하지도 않았던 차에...
뭐라 말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내 차례가 돌아오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좋은 아빠가 되고 싶습니다"였다.
얼떨결에 나온 말이었지만, 내 중심에서 아버지의 사역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과업이라 여겼던 것 같다.

그로부터 10여년이 흘러, 하나님께서 아들 둘을 선물로 주셨다.
큰 아이의 탯줄을 자르고 처음 받아 안았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
그 아이가 지금 7살이 되었다.
너댓살 무렵, 한창 말문이 터졌을 때, 큰 아이와 함께 종종 마을 산책을 나가노라면
아들은 수십가지 질문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냈다.
풀에서, 지렁이에서, 나무에서, 하늘로, 다시 새에서, 강아지에서, 돌멩이로....
아들의 전방위적인 질문을 방어하면서 귀찮다기보다는 참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요즘은 책을 읽을 줄 아니까 질문을 할라치면 책을 소개하거나 읽을거리를 주는 식으로 대치하기도 하지만.....
이제 곧 4살이되는 둘째가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다. 나도 심호흡을 하며 준비하고 있다.
이런게 아버지의 과업이고, 즐거움과 보람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이 자라오는 것만큼 나이 들어가시는 아버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언제나 다부지고 당찬 모습의 아버지, 계단을 오를라치면 두 세계단씩 성큼성큼 뛰어올라가던 아버지셨는데....
이제는 조금씩 할아버지의 품위가 묻어나오는 나의 아버지......
내가 아버지가 되면서 나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던 것 같다.
내 아들이 나에게 그렇게 질문을 쏟아내던 것 만큼이나 나도 아버지에게 그렇게 질문해댔을텐데.....

8살 때, 서재에서 설교준비를 하시는 아빠에게 무차별 질문을 쏟아대던 어느날
한참을 응수하시던 아버지는 나에게 책 한권을 내미셨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그것이었다.
8살 1년동안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버이 날을 막 지나왔다.
날짜에 맞춰 선물 하나 보내드리고, 아침시간에 맞춰 전화 통화 한번 한 것으로 올해는 성적이 괜찮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날 아버지께서 이메일을 하나 보내오셨다.
"제목없음". 제목을 클릭해보니 내용도 없었다. 그냥 링크주소가 한 줄 붙어있었다. 그게 다였다.
http://bigmail11.mail.daum.net/Mail-bin/bigfile_down?uid=waR6gpFiOdziPA4p-E995YgTM8FDOMiu
짧은 이야기였지만, 한참을 생각하게했다.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나의 아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나를 생각하고......
그렇게 한참을 생각했다.....
아버지의 질문을 귀찮아하는 아들. 그 질문을 다 받아주었던 아버지.....
나에게 내 아들이 소중한 것만큼, 나도 아버지에게 소중한 아들일텐데.....
나를 받아안고 춤을 추었을 아버지, 나의 모든 실수와 약점까지도 감싸안았던 아버지였을텐데....

아들이 자라는 것만 보면서 아버지가 나이들어 가시는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되겠다.
아들이 질문이 흐뭇한 것처럼, 아버지의 질문도 감사함으로 받아 품을 수 있으면 좋겠다.
자녀양육이 중요한 것만큼 부모공경이 중요함을 놓치면 안되겠다.

성경은 자녀에게는 부지런히 가르치라하고, 부모님께는 주 안에서 순종하라 하셨다.
어느 한쪽도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과업이다.
내가 내 아들의 아버지가 되기 전부터 나는 내 아버지의 소중한 아들이었으니......
좋은 아버지가 되기위해서만 애쓸 것이 아니라, 먼저 좋은 아들이 되기 위한 노력을 놓치지 않아야겠다 다짐해본다.

아들과 함께 있을 날보다 아버지와 함께 있을 날이 더 짧을 수 있기에, 두고두고 아쉬움이 되지 않도록.....
아버지의 마음에 아들이 자랑과 보람이 될 수 있도록, 섭섭한 마음 없도록...... 섬세하게 그 마음을 보듬어 드려야겠다.

어버이날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물으신다. "네가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니?"


2010년 어버이날을 지나며
김인집 목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