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W.C.C.의 실상과 Ecumenical운동의 허상 2009.12.31 | 조회:272

양광호 찬성 35 | 반대 34


양광호 박사(VA Fairfax한인교회 담임, 평택대학교 외래교수)



(Roman Catholicism과 Universalism의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본)
W.C.C.의 실상과 Ecumenical운동의 허상

서론

기독교 역사 중 20세기에 이루어진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운동은 W.C.C.의 출현과 그로 인한 Ecumenical운동일 것이다.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이 통전적인 신앙고백, 즉 Nicene Creed와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또 삼위일체적인 기독교의 이해를 가지고 교회의 일치를 이룩하자는 취지와 목적을 표방해왔다. 이러한 취지와 목적만을 생각한다면 이에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기독교의 사회적인 책임성과 관련해서, 또 예수님의 대 위임사명인 선교라는 명제를 고려할 때 뚜렷한 명분과 이유를 제시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었다.

W.C.C.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과는 다르게, 즉, ‘교리의 일치를 통한 A Super Church의 구현을 추구하지 않는다.’라는 본래의 입장 표명과는 달리, 사회적인 표어의 제시와 함께 거대 교회 조직체의 모습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또, W.C.C.의 실제적인 상황은 정체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기에 충분한 비 복음적인 모습들이,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 삶과 봉사위원회 (Commission of Life and Work), 그리고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ommis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의 활동과 선언에서 나타난다. W.C.C의 세 위원회의 선언들은 전세계에 전해지면서 W.C.C가 하나의 거대한 초교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한국의 K.N.C.C.는 W.C.C.의 제10회 부산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에 W.C.C의 3가지 중추 활동 영역인 신앙과 직제 위원회, 삶과 봉사 위원회, 그리고 세계 선교와 복음화 위원회의 전도된 Ecumenical운동을 살펴보며 W.C.C.의 기독교정신에 어긋난 실상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먼저, W.C.C.의 정체성에 관한 비기독교적 요소를 파악하고, Roman Catholicism의 유입으로 Ecumenical의 진정한 정신을 상실한 신앙과 직제위원회의 상황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다음, Universalism의 영향으로 왜곡 되어 버린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의 모습을 설명하고, 기독교의 정체성의 균형을 상실한 삶과 봉사 위원회의 사회복음화로의 편향성을 비판하고자 한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양대 산맥과도 같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과 합동 측은 이미 W.C.C.의 사회적 참여와 한국적 상황 속 에서의 용공, 좌경화라는 명제 앞에 분열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W.C.C.에로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인정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며, 그간 W.C.C.의 사역에 동참해 왔다. 그러면서도 대한 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은 또한 예수 구원이라는 절대적인 구원진리의 수호자로써 많은 교단의 모범적인 역할을 감당해 온 것도 주지하는 사실이다. 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대표했었던,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Pentecostal적인 입장을 대변하며 K.N.C.C.의 회원교회로써 2013년 W.C.C. 제10차 총회의 부산 개최를 선도하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떠한 영향 속에 놓이게 될 것인가?

장로회신학대 이형기 명예교수는 “목회와 신학” (2009년 10월)에 “W.C.C.에 대한 오해와 이해”라는 기고문을 통해 W.C.C.의 Ecumenical운동은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고 하면서 W.C.C.의 정체성에 대하여 복음적인 정의를 내리고 2013년 부산 총회 개최에 대하여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교수는 기고문에서 “W.C.C.의 정체성에 관하여”, “Ecumenical의 성경적인 의미에 대하여”, “Ecumenical운동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그리고 “신앙과 직제의 교회 일치 추구의 발자취”와 그간의 W.C.C.의 총회에서 다루었던 교회 일치의 모습을 소개함으로 전혀 잘못이 없음직한 W.C.C.에 대한 인상을 주고 있다. W.C.C.의 제10회 부산총회를 반대하는 보수 복음주의의 교단을 의식한 것인지, 아니면 W.C.C.의 입장을 수용한 대한 예수교 장로교 통합 측을 고무하려는 뜻에서 W.C.C.에 대한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필자는 이형기 교수의 위에 언급한 기고문에서, Ecumenical의 정신 만을 앞세워, Roman Catholic교회에 대한 무비판적인 태도로 일관된 자세는 개혁주의 신앙의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또한 다원주의적인 종교간의 대화에 대한 W.C.C.의 입장을 비판 없이 받아드리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또한 보수 복음주의의 입장에서의 W.C.C.의 제10회 총회의 부산 개최를 반대하는 것도, 즉흥적이거나 일회성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되며,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사회와 기독교계에 주며 반대해서도 안 된다. W.C.C.의 제10회 부산개최의 Issue가 있기 전에는 보수 복음주의 교단들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순 복음 교회 측이 K.N.C.C.를 통해 W.C.C.의 사역에 협조해 온 것에 대해 이를 문제삼지는 않지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그를 믿는 믿음 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의 정체성에 비추어 W.C.C.에 나타난 Roman Catholicism과 Universalism의 영향을 살피며 K.N.C.C.의 W.C.C.에의 참여를 비판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본 소고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W.C.C.의 참여에 대한 자기 반성의 기회가 되어지는 데에 일조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미 결정된 W.C.C. 제10차 부산 총회의 개최는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W.C.C.가 어떠한 기독교의 정체성의 바탕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한국의 W.C.C. 참여교단이 궤도 수정을 하든지 아니면 W.C.C.내에서 어떻게 처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응책을 세울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본론

1. W.C.C.의 정체성에 대한 재고

먼저 세계 교회 협의회(World Church Council)의 기원과 전개 과정을 살펴 보자.
W.C.C.는 20세기 초반의 3가지 Ecumenical적인 일치 운동의 영향으로 1948년 암스테르담의 회합으로 생겨났다.

1)세계선교 활동을 하던 Protestant교단들이 상호협력을 위해서 1910년 8월에 스코틀랜드의 에딘 버러에서 최초의 모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후, 계속 모임을 가질 것을 결의한 후, 1921년 국제 선교 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즉, I.M.C.를 구성하였다. 이 I.M.C.는 1948년 W.C.C.의 결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그 후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1961년 W.C.C.에 합류되었는데, 영혼을 위한 복음을 전개하는 선교연합 단체로서의 기능을 발휘했으나, W.C.C.에 합류된 이후 W.C.C.의 사회복음화라는 흐름 안에 합류되어 타 종교와의 대화 프로그램으로 본래의 개인 복음적인 영혼구원적 선교의 색깔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이 흐름은 결국 W.C.C. 내의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ommis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의 종교 다원주의적인 모습을 표현하게 되고 말았다.

2) 다른 W.C.C. 태동의 영향은 1895년 8월의 스웨덴의 바드스테나에서 개최되었던 청년집회가 세계기독학생연맹(The World’s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을 결성 시킨 것이다. 목적은 세계학생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하며, 영적 생활을 강화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도록 선교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W.S.C.F.의 의장단들이 W.C.C.의 임원이 되게 된다. 초기의 W.C.C.는 개인적 영혼 구원의 선교에 초점을 맞춘 선교단체들의 이념이 밑받침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이 흐름은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로 명명되며, Vatican Council II이후의 Roman Catholicism과의 연대로 기독교적인 이념을 흐리게 하고 말았다.

3)또 하나의 중요한 영향은 구미 각국의 산업화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기독교 사회 운동들이 일어 났던 것이다. 미국의 The Social Gospel Movement, 영국의 The Christian Social Union, 독일의 Evangelish Sozialer Kongress, 프랑스의 사회문제 대책 개신교 연합회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사회운동의 영향으로 미국의 교회연합회는 1908년 개신교회 사회신조(The Social Creed of the Churches)를 채택하게 되며 이러한 사회적 관심이 W.C.C,의 주도적인 흐름으로 W.C.C.의 사회선교 정책을 주도하여 왔다. 이 흐름은 삶과 봉사 위원회(Commission of Life and Work)로서 W.C.C.의 상황 신학적인 사회 참여에로의 편향성을 가지게 된다.

W.C.C.는 창립 당시부터 정체성에 대하여 밝혀 왔다. 1997년 W.C.C. 창립 50주년을 위해, W.C.C. 중앙위원회에 위해 채택 되어진 ‘W.C.C.의 공동이해와 비전을 향하여’는 W.C.C.의 변화된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W.C.C.에의 진입과 종교 다원주의적인 관심의 표현이다.

“W.C.C. 창립 총회 때에 ecumenical운동으로부터 고의적인 거리를 유지하였던 로마 카톨릭교회는 많은 국가 에큐메니칼 조직체들 및 여러 개의 지역 에큐메니칼 기구들의 정회원이 되었고, 또한 W.C.C.와 정규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들을 가지며, 특별히 신앙과 직제 위원회(Faith and Order Committee)의 공식 회원 됨을 통하여 W.C.C.와 관계를 갖는다.”(1)

본래 W.C.C.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Ecumenical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교회의 일치를 추구하는 기독교 신앙의 생활화와 사회화를 위하여 나타난 운동이다. 이 기독교의 신앙이란 개혁주의의 전통을 따른 19세기말 20세기 초의 선교적 열정을 간직한 신앙이었다.

초창기의 Ecumenical적인 방법론은 분명히 Roman Catholicism을 배제한 것이었으나, 1965년 이후 Roman Catholic교회는 W.C.C.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문제는 개혁주의적 신앙과 Roman Catholicism의 일치에의 한계이다. 교회론, 성령론, 기독론, 구원론의 서로 다른 이해는, 사회에 대한 기독교의 선교적인 책임을 위하여 Ecumenical적인 연대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Roman Catholic교회는 1965년 제2회 Vatican Council 이후, karl Rahner의 Anonymous Christian의 개념을 수용하고 타종교내에서의 구원을 인정하며 Universalism을 적극 수용한다. 구세주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는 Roman Catholic 교회를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 정회원으로 인정한 W.C.C.가 종교다원주의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교회들”의 W.C.C.의 소개 문구를 고쳐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Ecumenical을 단지 기독교적인 교회들의 일치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놀라운 변화이다.

“W.C.C.형성에로 이끌었던, Ecumenical적인 과정은 단지 기독교의 일치에 대한 복음 명령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와 공동의 증언과 인종, 계급, 국가, 종교의 노선을 따라 갈라진 세계에서, 정의와 화해와 평화의 추구에 대한 공동의 헌신에 대한 한 표현이다.”(2)

“비록 종교간의 만남과 대화가 더욱 보편화 되었을지라도, 종교적인 충성들로 인해 증오와 폭력이 조장되어 왔다. 종교적 자유가 보편적이고, 헌법으로 보장되어도, 종교적 소수자 들의 상황은 (약간의 기독교 교회들을 포함하며) 사실상 많은 곳에서 점증적으로 위태롭게 되었다. 그 외 다른 곳에서 종교적 자유라는 바로 그 원리들이 도전 받게 되거나 혹은 새로운 갈등을 야기했다”(3)

1) 문전섭역, “선교, 회고와 전망”(한국장로교 출판사 2007)중 “W.C.C.의 공동이해와 비전을 향하여”(Konrad Reiser)199
2) Ibid., 201
3) Ibid., 202

W.C.C.가 기독교의 신앙에 근거한 교회의 협의체로써의 정체성을 표현한다면, 위의 표현은 받아 들일 수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W.C.C.가 더 이상 교회만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갈라진 세계의 모든 현상을 바라보며 인종, 계급, 국가, 종교의 노선을 따라 분열된 세계의 화해와 평화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얄이 어찌 조화될 수 있겠는가?(고후 6:14-15)라고 말씀하고 있다.

종교를 넘어서는 세계평화를 위해서라면 세계 교회 협의회 대신에 세계 종교 협의회로 그 명칭을 대신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들이 어떻게 다른 종교적 소수자 들의 위태로운 종교적 상황을 우려하는가? 그것은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화적인 Issue일 뿐이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의 유일성을 설명해 주며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W.C.C.의 본래 선교적인 사명일 것이다.

W.C.C.는 1997년에 중앙위원회에서 채택한 “공동의 이해와 비전을 향하여”에서는 1950년 토론토 중앙위원회가 초안하고 채택된 “무엇이 W.C.C.이고 무엇이 W.C.C.가 아닌가”를 재확인했다.

“무엇이 W.C.C. 인가?” 8개의 긍정적 선언으로 나타나고 무엇이 W.C.C.가 아닌가? 는 다음 다섯 가지의 선언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체성의 표현은 더 이상의 개혁주의적인 기독교를 나타내는 표현이 되지 못한다.

1. W.C.C.는 초교회(A Super-Church)가 아니며 또한 결코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된다.
2. W.C.C.는 교회간의 연합을 협의하는 곳이 아니다.
3. W.C.C.는 어떤 특정한 개념에 의해서 기초되지 않는다.
4. W.C.C.는 한 교파의 교회에 대한 개념을 단순히 상대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5. W.C.C.의 회원권은 교회 일치의 본질에 대해 어떤 특수한 교리의 수락을 뜻하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금까지 이러한 거대한 범 교회적인 협의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W.C.C.는 정체성의 표현에 있어서, 초 교회인 A Super-Church를 지향하지는 않지만, 그 조직 자체 만으로도 충분한 Super Church로서의 모습을 보여왔으며 전세계의 언론매체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럼으로, W.C.C.의 선교정책에 대한 입장표명은 매 번 지대한 반향과 영향을 세계교회에 주어 왔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는 W.C.C.의 초창기의 모습과는 다르게 Roman Catholic교회가 정회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기에, 그로 인해 Roman Catholic교회에서 Vatican Council II 이후(1962-1965)에 수용한 Universalism의 영향 속에 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아무리 W.C.C.가 A Super-Church라는 초교회로의 모습으로서, 교리의 일치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정체성에 대한 선언을 할지라도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그 동안의 활동과 선언은 이미 초교회의 모습으로서 전세계에 충분한 영향을 주었다고 할 것이다.

또한, Roman Catholic 교회와의 연대를 통한 Ecumenical운동은 이미 기독교 Protestant의 연합으로서의 Ecumenical 운동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며, 더욱이 W.C.C.가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을 받아들인 현재의 상황에서의 Ecumenical 운동은 더 이상의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만으로 W.C.C.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없다. W.C.C.는 21세기의 종교 다원적인 문화상황 속에서 종교 서로 간의 존립을 위하여 충돌을 피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틀 속에서의 Ecumenical운동을 전개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기독교 교회의 연합체로서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으며 아마 세계종교연합체(World Religion Council) W.R.C.라고 부르는 것이 현재의 W.C.C. 보다 더 합당한 단어가 될 수 있다.

적어도 1965년 Vatican Council II 이전에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W.C.C.의 Ecumenical적인 노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도 이해와 수용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Roman Catholic교회가 Ecumenical의 우산 아래 W.C.C.에 합류된 것은 W.C.C. Ecumenical 운동의 절대적인 과오라고 생각한다. Roman Catholic교회와 개혁주의인 기독교 Protestant 는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구원론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형식적인 모습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점에 있어서 일치를 추구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이해가 다르며 구원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 종교 다원주의 신학을 수용한 Roman Catholic교회에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 Full Membership을 허락하게 됨으로 그 동안 W.C.C.가 추구해 온 Ecumenical운동은 지금까지의 온 세계 속의 하나님의 교회(Oikoumene)의 일치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이제는 다문화, 다 종교, 복합 사회의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라는 의미로 Ecumenical 운동을 해석하고 있다.

“1975년 ‘나이로비 세계교회 협의회’는 JPSS(Just, Participatory and Sustainable Society)란 표어를 걸고 하나의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자는 Ecumenical 운동을 제창한다. 그후에, Oikoumene의 의미는 창조 세계 보전 차원에서 온 우주를 포함하고, 최근에는 타 종교들과의 대화도 포함하고 있다.”(4)

Ecumenical의 의미는 이제 다양한 종교 간에서의 일치를 뜻하는 것으로까지 변화하게 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장신대의 이형기 명예교수는 “목회와 신학” 기고문에서 Roman Catholic 교회의 W.C.C.에의 Membership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의, 개혁주의 신학을 받아들인 교회들은 Roman Catholic을 일치와 연합을 위한 상대자로 생각해 오지 않았으며, Roman Catholicism도 반개혁주의의 노선을 따라 자신들의 입장을 더 강화 시켜오고 있다. 이러한 입장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Ecumenical운동에 합류한 것은 그들의 반개혁적인 입장을 포기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으며, 그것은 전세계의 모든 교회들을 Roman Catholic교회라는 하나의 우산 아래 모으기 위한 전략인 것이다.

이형기 교수는 무엇이 W.C.C.인가를 소개하면서 Ecumenical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과 같은 신약 성경에 증언된 하나의 교회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고백하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들을 말한다” (5)고 하면서 그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등 역사 속의 경험적인 교회들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4)이형기, “목회와 신학”(2009년 10월) 159
5) Ibid., 156

또한 W.C.C. 중앙위원회가 1997년에 채택한 “W.C.C.의 공동 이해와 비전을 향하여”의 제4장 11조는 Roman Catholic교회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며 깊은 연대와 일치를 표현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회의 이래, 여러 가지 방법들에서 W.C.C.와의 Ecumenical운동에의 한 적극적인 참여자로 그리고 귀중한 동역자가 되어 왔다.(특별히 신앙과 직제에 대한 위원회에의 공동의 그룹 및 참여를 통하여). W.C.C.의 회원교회들과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합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그 동일한 비전에 의해 감동을 받아 왔다. W.C.C.든 로마 카톨릭이든, 그 다른 편의 협력 없이 그것의 Ecumenical적인 소명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음 직 하지 않다. 그리고 특별히 로마 카톨릭 교회가 근년에 있어서, W.C.C. 회원 교회들이 속해 있는 여러 지역의 Ecumenical조직들과의 관계를 심화 시키고 확대할 것이라고 관망된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쌍방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W.C.C.의 회원교회들은 이 친교의 공동체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부재에 의해 황폐해지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W.C.C.와 Roman Catholic교회와의 관계성에 대한 홍보가 K.N.C.C.를 통하여 그 동안 한국교회에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W.C.C.는 더 이상의 개혁주의적이고 Ecumenical적인 선교와 복음을 위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다. W.C.C.는 근본적인 구원론의 차이로 인한 개혁주의 Protestant 교회와 Roman Catholicism과의 Ecumenical의 한계성을 확인해야 한다.

2. Roman Catholicism의 영향으로 혼돈되어진 신앙과 직제 운동(Committee of Faith and Order)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16세기 이후 ‘Sola Fide’라는 개혁주의의 주장은 기독교의 현재성과 사회성을 고려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교회들의 일치를 이루자는 20세기의 Ecumenical적인 입장을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는가? 1545-1563년, 종교개혁 이후의 Catholicism은 그들의 Trent종교회의에 있어 개혁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입장으로 확인되고 정리 되었으며, 그들은 그들의 주장을 지금까지 불변의 진리로 고수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한다는 관점에서, 또 기독교의 현재성과 사회적 책임과 연관해서 개혁주의와 Catholicism의 일치를 추구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근본적인 구원과 영생의 고백에 있어, 행위(Deeds)의 역할에 대한 구원론적인 이해의 현저한 차이는 목숨을 걸만큼의 공유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는 것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구원론을 이해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통된 인식이었다. 즉 구원론(Soteriology)의 차이뿐 아니라, 교회론(Ecclesiology)과 기독론(Christology), 성령론(Pneumatology)의 이해가 다른 Roman Catholic 교회와의 Ecumenical 운동은 아무리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보수복음적인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한 인식의 차이가 Ecumenical 운동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며, Roman Catholicism의 종교다원주의의 수용은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시란 개념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Roman Catholicism의 Pelagianism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선하게 될 수 있음을 강조하다 5세기에 이단으로 정죄되었으나 계속하여, Catholicism에 나타나 인간행위와 공덕을 통한 구원의 도리를 설명하는 교리이다.

도덕적인 행위를 통하여 영생에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무효화(nullify)하는 것으로 개혁주의 정통기독교의 신앙의 입장에서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이 있을지라도 그것만으로 영생에 이를 수 없으며 선한 삶의 행위와 윤리적인 도덕 규범을 이루어 가며 완전한 성화의 단계에 들어갈 때에야 영생을 얻을 수 있고, 영생을 현재의 삶의 시간 속에서 확신할 수 없으며 확신할 수 있다고 하는 자는 가장 교만한 자라고 구원과 영생을 설명하는 것이 Roman Catholicism의 구원의 교리가 아닌가? Pelagianism은 ‘Sola Fide’를 외치면서 Reformist들이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과는 합쳐질 수 없는 구원교리를 설명한다.

Roman Catholic교회의 입장에서 W.C.C.의 출현은 또 다른 거대 교회의 출현으로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Roman Catholic이 Protestant의 Ecumenical적인 움직임을 긍정적인 입장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하는 인식은 제2차 Vatican Council이 종료된 1965년 이후이며 이 때부터 그들은 Ecumenicalism에 대한 연구와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 그것은 상호 이해에 근거한 기독교의 사회성과 현재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이 땅에 이룩하자는 W.C.C.의 본래적 이상과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Protestant의 Super Power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 진 것이다.

실재로 Roman Catholic은 아직 W.C.C.의 정회원은 아니다. 그 이유는 “Roman Catholic doesn’t want to be a dwarf.”라는 신임 W.C.C.사무총장인 노르웨이인 Olav Fykse Tveit의 진술에서 나타난다. 12억의 신자를 가지고 있다는 Super church인 Roman Catholic교회가 5억6천만의 교세를 가진 W.C.C.의 일반회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와, 세계 선교와 복음위원회(Commis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에 투표권을 행사하는 Full Membership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W.C.C.에 행사하고 있으며, C.W.M.E에는 교황청의 수녀들을 연구위원으로 파송하고 있다.

이것은 W.C.C.가 Ecumenical이라는 명제 앞에 Roman Catholicism의 심각한 영향권 속에 이미 들어가 있으며 Vatican Council II 이후에 공식적인 입장으로 타 종교 내에도 Anonymous Christian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하며 그들은 그들에게 암시적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구원된다고 하는 Karl Rahner의 입장을 수용한 Roman Catholicism의 Universalism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개혁주의의 기독교와 Roman Catholicism의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고백을 통한 일치성을 확인할 수는 있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보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우리의 구주는 온전한 구원사역을 이루신 분이지만, Roman Catholicism의 우리의 구주는 구원에 이르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신 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Roman Catholic교회와 어떠한 Ecumenical적인 일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W.C.C.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는 W.C.C.의 배경이 되었던 로잔 세계 선교 대회(Lausanne, 1927)때의 신앙고백의 일치는 사도신경과 Nicene Creed를 공동신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메시지의 근간으로 한다는 선언을 기억해야만 한다.

“세계를 향한 교회의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그리고 항상 그 복음으로 존속하여야만 한다.” (6)

그러나 Roman Catholicism은 종교다원론을 수용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신앙과 직제 위원회 중앙위원회가 1950년에 W.C.C.는 무엇인가? 에서의 제6항이 1997년 중앙위원회의 ‘공동의 이해와 비전을 향하여’ 에서의 제6항과 다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1950년 토론토 중앙위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참여한 1997년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의 중앙위원회는 ‘예수’의 단어를 제외하고 ‘주님”과 ‘그리스도’만의 문구를 쓰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W.C.C.의 회원교회들은 서로 협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배우며 주께서 당부하신 대로, 그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아가 증언할 것을 다짐한다.” 1950년 토론토 중앙위원회

“W.C.C.의 회원교회들은 주님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세계에 그들로 하여금 무슨 증거를 전하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주님으로부터 배우기를 추구함에 있어 함께 즐거이 협의하고자 한다.” 1997년 중앙위원회의 W.C.C.의 공동 이해와 비전 (7)

6) (Lausanne, First World Conference on Faith and Order, Para. 9)
7) (The Church, The Churches and W.C.C., The ecclesiological Significance of W.C.C., Statement received by the Central Committee, Para. 3-15)

3. Universalism의 영향으로 왜곡되어진 세계 선교와 복음화 운동 (C.W.M.E.)

Commis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에서는 타 종교와의 대화라는 Channel을 통하여 종교다원주의적 연구가 완성되었으며 인준의 절차를 통해 W.C.C.총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될 것은 시간의 문제이지 명약관화한 사실이라는 것은 W.C.C.의 현재적인 정황을 통하여 분명히 통찰할 수 있는 바이다.

Ecumenical운동은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앵글로 색슨족의 선 기독교적 이해를 바탕으로 비 북미, 비 유럽 지역의 복음적인 선교를 위한 교회의 일치를 위해 1차적인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W.C.C.의 출현은 초반부에서는 적어도 보수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커다란 문제성을 제기하지 않았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1년 I.M.C. (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가 W.C.C.에 합류하게 되었을 때, 개인의 영혼구원과 복음전파라는 I.M.C의 Generic(태생적)한 입장이 보수복음주의자들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복음이라는 명제를 강조하며 W.C.C.의 주도적인 상황윤리적 신학(Contextual Theology)의 영향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W.C.C.의 선교정책은 이미 다문화적인 새로운 시대인식과 함께 근본적인 기독교의 신앙고백과는 다른 쪽으로 기독론의 이해를 변형시키며 sift의 중심 축을 움직여 가고 있다. (1973년 방콕대회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구원론적인 고백에서 신중심적인 구원론의 입장으로 통전적인 그리스도의 의미를 변형시켰다. 그리스도는 문화적인 Factor를 고려할 때, 히브리적인 문화 상황 속에서는 예수로 나타나지만, 타 문화권에서는 암시적으로 부처나 브라만의 범사상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함.)

W.C.C.의 C.W.M.E.(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는 1970년대 타 종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종교간의 대화의 프로그램을 구체화하고 1971년 인도 신학자인 S.J. Samartha를 책임자로 선정했다. 그는 선교, 전도, 선교 전략 같은 용어는 종교적 제국주의의 상징이고 비적절한 성경적인 단어라고 말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고, 신앙은 역사적 경험의 산물이기에 사람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의 입장을 제시하였다.

W.C.C.내의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Samartha는 종교간의 대화가 종교다원주의 사회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며 성경의 진리와 힌두교적 진리의 상호보완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또, 타 종교 속에도 그리스도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보편 기독론을 주장하여 마호멧, 짜라투스트라 등을 예수와 동일시 했다.

그는 교회 일치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류연합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종교인들의 협력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Samartha의 입장에 기초하여 1971년 아디스아바바 C.W.M.E. 총회에서는 타 종교와의 대화를 주요 사업으로 채택한다. 나이로비 총회, 치앙마이 총회를 거치며 1979년 킹스턴 총회에서는 대화국을 설치하고 중앙위원회와 타 종교와의 대화를 위한 지침을 채택했다. 이 지침은 혼합주의의 위험을 경계하지만, 타종교 신봉자들도 신학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시도는 1983년 W.C.C. 제6차 뱅쿠버 총회를 거치면서 더욱 확고해지고, 타종교인들에게도 궁극적인 실재에 대한 통찰력과 경험이 있다고 인정하기에 이른다. 1989년 C.W.M.E.의 산안토니오 대회에서 C.W.M.E.총무 스톡웰은 타종교에 속에서도 하나님은 발견될 수 있으며,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W.C.C.가 Ecumenical운동을 표방하다 종교다원주의에 빠지게 된 원인을 류현웅 목사는 이렇게 분석한다. “첫째는 호켄다잌의 Missio Dei가 1952년 빌링겐 대회 이후, W.C.C.의 선교신학의 기초가 되면서, 이 이론이 1961년 뉴델리, 1968년 웁살라 W.C.C 총회를 거치면서 복음과 선교의 개념을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교론이 제시하는 샬롬의 구현이 전체 Ecumenical 신학의 기본으로 받아들여지며, 복음전도에 대한 W.C.C.의 입장은 점차 보편구원설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둘째는, 타종교와 문화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면서 W.C.C.가 기본적으로 대화의 틀을 견지했기에 복음전도의 열기는 식어질 수 밖에 없었다.” (8)

8) 류현웅, W.C.C.종교간의 대화가 기독교 선교에 미친 영향

결국 W.C.C.가 추진한 종교간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은 기독교 신앙의 절대성과 유일성이 무시되고 훼손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타 종교 속의 영성과, 타 종교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시도는 포괄적인 종교 혼합주의와 Universalism으로 전개되며 W.C.C.의 C.W.M.E.에 왜곡된 선교의 모습을 제공하고 기독교계에 큰 혼란을 몰고 왔다.

W.C.C.의 종교다원주의적인 타 종교와의 대화의 시도는 결국 인간의 이성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가두어 버리는 것이며, 기독교 선교의 동기를 없애버리는 행위이다.

4. W.C.C.의 삶과 봉사 위원회 (Commission of Life and Work)의 사회복음화로의 편향성 비판

기독교의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과 그것의 결과론적인 사회정의와 윤리의 완성이라는 기독교의 정체성이 W.C.C.의 삶과 봉사위원회의 지나친 사회 복음화에 대한 관심으로써, W.C.C.는 균형을 상실한 채, 정치, 사회, 문화적인 하나의 Ideology 집단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의 존재에 대한 영혼, 육체의 2분 적이거나, 영, 혼, 육체의 3분 적인 이해와 영혼의 영원성과, 인간의 육체보다 영혼이 한 인간의 존재성과 인격성을 더 잘 설명한다는 인간론의 이해와 이러한 인간의 사후의 영속적인 존재로서의 영원성이 이해되어야 온전한 기독교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 기독교의 사회적인 책임만을 강조하여, 기독교의 인간적인 이해를 무시하고,”하나님의 나라는 죽은 후의 천당을 말하지 않는다. 이미 역사 현실 속에 개재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9) 고 하는 사회복음적 기독교의 이해만을 가지고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입장에 서 있는 자들과 보수 복음주의자들이 서로 일치와 화해를 추구한다는 것이 원천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9)고재식, “교회와 사회” 편, 기독교 윤리학 개론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7) 271

이러한 일치의 한계성을 의식한다면, 사회참여적인 태도만을 가지고 W.C.C.를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W.C.C.의 Roman Catholic교회와의 연대,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를 비판하는 방향에서 W.C.C.의 Ecumenical운동을 변혁하도록 촉구하는 시도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그 동안 복음주의적인 열정을 보여온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 측과 여의도 순 복음 교회를 중심으로 한 오순절주의의 교회들이 W.C.C.의 제10차 부산총회를 준비하며 한국교회의 차별적인 기독교의 모습을 보여 주고 W.C.C.의 지나친 사회참여적인 Ecumenical의 모습을 개인 영혼의 구원의 관점으로 바꾸어 가며 균형 있는 정책을 촉구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일까?

W.C.C.는 근본적인 차이로 인한, 개혁주의의 Protestant 교회와 Roman Catholicism과의 일치의 한계성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기독교와 Roman Catholicism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고백을 통한 일치성을 확인할 수는 있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보수 복음주의적 입장에서의 우리의 구주는 온전한 구원사역을 이루신 분이지만, Roman Catholicism의 우리의 구주는 구원에 이르는 좋은 본보기를 보여 주신 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가진 Roman Catholic교회와 어떠한 신앙의 Eumenical적인 일치를 이룰 수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구세주로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 존재의 불멸하는 영혼의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정확한 이해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가며 사랑과 정의의 윤리적인 모습을 현세에 나타내야 하는 기독교의 사회성과 현재성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복음의 필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의 현재적인 삶 속에 나타나야 하는 사회적 선과 정의는 복음화 운동을 통한 결과론적인 모습이고 기독교인들이 지향하는 신앙의 실천적인 모습이지 그것이 기독교의 총체적인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내세의 존재를 초월적이며 체험적인 경험을 통하여 인지하기 때문이며, 사도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20세기 초의 미국의 Azusa 거리에 있어서의 Pentecostal적인 부흥운동과 교단의 차이를 극복하고 해외선교를 이루고자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 운집했던 제1차 Ecumenical 모임, 20세기 초반의 한국에 있어서의 대 부흥 운동, 20세기 중후반의 여의도 순복음 교회에서 나타난 오순절적이며 초월적인 성령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를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려는 자들에게 있어서 인류학적이며 사회학적인 방법론을 통하여 종교라는 단어로 기독교를 구별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적어도 보수 복음주의적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정의롭고 선한 행위의 목적으로 특징 지어지는 종교라는 단어로만 설명 할 수 없는 생명 살리는 복음운동이다.

진리는 진리로서의 일반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비 진리를 거부하는 배타성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에 기독교의 배타적인 진리를 거부하며 독선적이라고 비난하는 자들의 비판을 수용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일반종교와 기독교를 동일시하는 입장은 기독교의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사랑과 정의의
윤리적인 가르침이 일반 종교의 교훈과 동일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며 인간의 삶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행위를 최고의 도덕적 선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데서 기인한다.

더욱이 기독교의 내세성을 비판하는 자들은 기독교의 내세주의적인 천국의 개념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교리로 비판하며 가시적인 현재의 삶 속에서의 도덕적인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 바른 종교의 모습으로 이해하고 기독교의 현실참여적인 사회복음만을 바른 기독교의 모습으로 받아드리려 한다.

일반 종교들은 사회적인 윤리성과 그것을 이루기 위한 도덕적인 계율을 사회에 주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 사회적인 정의와 선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사회와 관련된 개인의 도덕성을 통하여 영생에 이룰 수 있다고 한다.

W.C.C.가 기독교의 사회적인 책임을, 타 종교와의 대화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종교다원주의의 핵심인, 계율과 규범의 행위적인 의미로서의 구원의 이미지로 변형한 것은 참으로 비 복음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는 선한 행위에 의해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 살리는 복음 운동이기 때문이다.

결론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합동 측과 고신 측이 2013년 W.C.C.의 부산 개최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함으로 보수, 복음주의자의 입장에서, 비 복음적인 모습과 구별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반대 입장의 이유가 50년 전의 선입견으로 인한 것이라면 충분한 반대의 이유가 되어질 수 없다. 이미 기독교의 사회 복음화를 위한 사회윤리로써의 사랑과 정의와 화해, 공존이라는 단어는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도 익숙하게 되어 버렸으며, 기독교가 사회의 정의를 위하여 연대한다는 원칙적인 W.C.C.의 Ecumenical운동의 취지에는 반대할 뚜렷한 명분이 없어진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의 사회를 위한 윤리의식의 제고를 위한 복음의 사회화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복음화만이 기독교의 선교적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거나, 사회 복음만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50년 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과 통합이 분열되었다. 용공의 Issue는 한국적인 상황 아래 특수한 의미를 더하며, W.C.C.를 좌경적인 색채로 도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사라진 지금의 상황에서 또다시 용공을 이유로, 기독교의 사회복음화를 위한 Ecumenical을 이유로, W.C.C. 제10차 총회의 부산 개최를 반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W.C.C.의 Ecumenical 운동이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사회복음화 일변도의 정책으로 일관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Roman Catholic교회와의 긴밀한 관계성을 갖게 되고, 그 영향으로 인해, 타 문화, 타 종교와의 대화를 통하여 기독교와 타 종교 간의 상호 갈등을 제거하겠다는 일련의 시도가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쪽으로 기울게 됨을 알리고 한국교회가 W.C.C.의 정책을 수정하도록 촉구 할 수 있어야 한다.

W.C.C.의 제10차 부산 총회개최를 계기로 분명히 해야 할 기독교의 정체성은 개혁주의 신앙정신이다. W.C.C의 제10차 부산 총회를 주최하는 입장은 가장 중요한 주최 반대 이유중의 하나가 W.C.C.의 Roman Catholic 교회와의 연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의 Ecumenical 운동에 소극적이던 Roman Catholic 교회가 1965년 이후에 기독교의 Ecumenical 운동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며 정회원은 아니지만, 이미 W.C.C.의 중추 핵심 운동인 신앙과 직제 위원회(Commission of Faith and Order)와 세계선교와 복음화 위원회(Commission of World Mission and Evangelism)의 정회원으로, 또, 연구 요원들을 파송 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 W.C.C.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며 Roman Catholicism과의 긴밀한 연결 관계로 인하여 W.C.C가 이미 종교다원주의의 영향 속에 들어갔고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임을 주지하며 제10차 부산 총회의 개최를 계기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Ecumenical 적인 노력으로 W.C.C.가 본래의 기독교의 정신으로 Ecumenical운동을 펼쳐갈 수 있도록 W.C.C.의 궤도수정을 할 수 있도록 일조해야 한다.

또한 보수 복음주의에서는 어떠한 대책을 수립해야 하는가? 2008년도 한국의 장로교 4개 교단의 Ecumenical적인 연합의 시도는 루비콘 강을 건너간 이야기인가? 교회의 일치를 추진해 온 W.C.C.의 Ecumenical적인 시도가 유독 한국에서 분열의 아픔을 주는 것은 가히 역설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보수 복음주의를 표방한 교회들의 입장에서 그 동안 지속되어온 목회사역의 번영 신학적인 측면이 보수 복음주의라는 입장의 한 모습으로 즉 개인적인 번영과 축복이 사회의 정의와 섬김의 모습보다 강조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았는가를 반성하며, 그것이 W.C.C.가 추구하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자.’ 라는 사회 복음의 대의 명분을 뚜렷한 사회정의로 일반사회에 각인시키어 결과적으로 W.C.C.의 적극적 활동을 묵과하지 않았는가를 숙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W.C.C.의 실상과 Ecumenical적인 허상을 바라보며 한국 기독교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W.C.C.의 Ecumenical 운동이 Roman Catholicism과 어떠한 모습으로 연결되었으며 그로 인한 종교다원주의의 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의 대책을 함께 의논하자는 의미에서 소고를 정리해 본 것이다.

양광호 박사(Ph.D. 조직신학)
미국 VA.주 Fairfax한인교회 담임목사
현 평택대학교, 횃불트리니티대학원대학교 출강
Liverpool Univ.(Ph.D.)
Catholic Univ. of America(Ph.D. Course work)
Princeton Seminary(Th.M.)
New York Seminary(M.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