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의 유리 현상은 한인교회 전반에 걸쳐 과거부터 깊게 제기되어 온 문제다. 한 극단에서는 신학적 지성이 목회 현장의 영성을 제한하는 방해 요소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목회적 열성이 신학없이 표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 본지는 현재 신학교에서 학업 중이면서 동시에 한인교회에서 목회를 함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을 만나 신학의 학문성과 목회의 현장성 간에 일치점을 찾아 본다. 시카고 지역에는 게렛신학교, 노스팍신학교, 루터란신학교, 맥코믹신학교, 무디신학교, 북침례신학교, 시베리웨스턴신학교, 시카고신학교, 시카고대 신학대학원, 위튼대학교, 트리니티신학교 등 다양한 신학교가 밀집돼 있으며 최근 한 통계에서 미국 전역에서 신학생 배출율 1위 도시인만큼 이 문제를 논하기에 좋은 토양을 갖고 있다.
세번째 인터뷰는 시카고루터란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에서 구약학을 공부 중인 김진양 목사다. 김 목사는 부산 경성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신대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목회자로 안수받았다. 거제도에서 목회하던 중 구약에 대한 이해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유학을 결심해 맥코믹신학교에서 M.A.T.S.를 마치고 루터란신학교에서 Th.M. 학위를 받았다. 현재 루터란신학교에서 구약학으로 Ph.D. 과정 중이며 논문 디펜스를 앞두고 있다. 시카고에서는 삼일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섬기고 있다. 루터란신학교는 진보교단인 미국복음주의루터교회(ELCA)에 속한 신학교이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다.
-구약학이 왜 필요한 학문인지부터 여쭈어 보겠습니다.
구약성서를 기독교인이 읽어온 지 2천년이 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라도 2천년동안 읽혔다면 충분한 연구의 가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2천년간 읽혔다는 말은 유대 히브리인들이 그것을 읽어 온 장구한 역사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기독교인이 읽어 온 역사만 따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학을 공부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차원에서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첫째,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교회의 책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서가 역사를 담고 있는 책으로 보지만 이것은 사실 역사가 아닌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으로 꼽는 구절이 신26:5-9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 구절을 부르고 암송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람 사람 야곱이 방랑하다가 이집트로 내려가 크게 번성하고 왕성해졌다, 그리고 이집트인이 학대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형적 역사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지 역사를 이야기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냐”는 본질적 질문에 그들은 “우리를 이민하게 하고, 번성하게도 하며, 때론 노예로 만들고 또 때론 해방도 시켜 주시는 분,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땅도 주시고 자유를 누리게도 하시는 하나님”이란 고백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왕하18장에는 앗수르가 쳐들어 오자 히스기야왕이 기도했고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의 군사 18만5천을 쳐서 죽였고 산헤립은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문헌에 따르면, 산헤립이 쳐들어와 히스기야의 항복을 받고 20만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고 돼 있습니다. 성경을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두 기록물은 서로 충돌됩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보다는 앗수르의 역사적 기록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것이 사실인지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이 바로 그들의 신앙고백이란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 위기 속에서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그들의 고백입니다.
시편 106편을 보면, 이것도 전형적인 역사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줄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입니까? 아니면 그냥 시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분석할 때, 신명기 사가, 역대기 사가, 예언자 전승, 왕조 전승 등 복잡하게 따지지만 이것은 모두 당시 구약이 전해진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의 신앙의 고백이란 점은 동일합니다. 신명기 사가가 고백한 하나님이 다르고, 역대기 사가가 고백한 하나님이 다릅니다. 다르다는 표현은 틀리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자리가 다르므로 고백도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사가의 바벨론 포로 이전은 철저히 왕조 중심적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리는 대리자입니다. 그러나 포로 이후는 왕이 없으므로 철저히 성전 중심적으로 바뀝니다. 왕을 세울 수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성전 중심 공동체에 대한 고백을 더욱 확실히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역사는 많아도 2백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약을 신앙고백의 책이라고 볼 때, 2천년간 고백되어 온 신앙을 조명해 보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누군지, 그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현재 삶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과 사역을 담고 있는 초대교회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와 그의 메시지를 구약성서에서 보여준 예언에 대한 성취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마1장은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명하고 이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를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 고백을 오늘의 현재의 삶에서 본다는 말이 무엇이죠?
예를 들면, 구약은 이민자의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살았지만 메소포타미아 사람이었고, 후에 이집트까지 이주해 갑니다.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며 강제이주가 일어납니다. 앗수르의 혼합정책으로 인해 민족과 민족이 섞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722년 이후엔 북이스라엘이란 것은 없지만 북이스라엘 사람은 있습니다. 주전 586년이 되면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또 강제로 이주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렘29장을 보면, 외국 땅에서 이민자로서 자신의 신앙적, 정치적 정체성을 지켜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 가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갔는지 그 하나, 둘, 셋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설교 적용은 상당히 쉽지 않은 주제로 꼽힙니다. 구약이 가진 방대한 내용뿐 아니라 복잡한 전승 구조, 히브리어에 대한 이해, 구약의 율법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약의 본문을 설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장 목회에서 주로 신약을 주제로 설교하거나 구약의 한 사건, 한 단편, 때론 한 구절만 뽑아서 설교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는 하나님이 선포되는 것이 아닌,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설교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는 ‘케리그마’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인물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보다는 구약의 인물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를 설교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설교할 때, 요셉을 강조합니다. 요셉이 뭘 했고 얼마나 지혜로웠고 얼마나 신실하고 믿음이 좋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창37-50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의 설교는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당사자인 요셉조차 “나를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놓칠 경우, 이 설교는 요셉의 이야기, 정말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구약에서 신앙고백이란 것을 놓칠 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구약에서 복음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2세기 마르시온 학파는 구약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고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사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지 폐기하러 오셨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 속에서 복음을 찾아 내는 일도 설교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겠지요. 레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율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뭘 하고 뭘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법의 핵심은 레위기 19장에 나와 있는데, 이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절기와 규례를 지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생일과 추석, 설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법의 궁극은 하나님 사랑, 인간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구약이 아무래도 이야기 형식으로 된 책들이 많기 때문에 설교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편적인 사례 인용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어떤 제안을 하십니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구약 연구는 본문의 단편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단편을 보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 전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구약학의 방향은 구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구약성서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메시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에게 통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통독은 무조건 막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 흐르는 맥을 찾는 것입니다. 구약은 오랫동안 전승되고 편집되면서 그에 맞게 맥과 흐름을 갖게 됐습니다. 구약이 가진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찾는 맥이 중요합니다. 통독을 하면 구약성서의 사가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각종 에픽과 설화 속에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보입니다. 이 통독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조리 읽는 게 아니라 창세기를 읽는다면 1장부터 50장까지, 적어도 1장부터 11장까지는 한번에 보는 것입니다. 1장부터 11장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 읽을 때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류는 타락했다입니다. 그 이후는 이 세상의 죄악이 너무나 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입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그리고 10장까지 가면 인류의 계보가 나오면서 인류가 다시 번성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11장에 가면 바벨탑이 나오는데 바벨은 흩어진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인류로 하여금 온 천하에 충만토록 하시는 축복을 말합니다. 창1장에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전체로 읽는 것은 구약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또 저는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토론식 수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토론을 하면 성도들이 안된다, 잘 못 배운다고 생각하는데 주입식으로 가르쳐서 그것이 몇 년을 가며, 삶의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주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르칠 때 한 본문을 놓고 두세 사람이 토론을 합니다. 토론 끝에 하나의 결론이 나기도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토론 후에 자신에게 필요한 성경 구절을 암송합니다. 우리는 유대 교육을 흠모하면서도 전의 과정은 생략하고 암송만 하려 합니다. 그러니 암송한 구절이 우리 삶을 터치하지 못하고 그 안에 하나님이 있기 어렵습니다.
- 이 문제와 관련해 구약학 연구의 추세가 실제 목회 현장에 어떤 도움을 준다고 보십니까?
구약은 확실히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구약학은 이 어려운 책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한 단락에 두개의 전승이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한 단락에 서로 다른 삶의 컨텍스트가 있게 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만 해도 1장과 2장에 두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하고 또 다시 창조를 하신 것일까요? 창세기를 읽을 때 그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갈이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난 이야기도 창세기에 두번 나옵니다. 학자들은 16장은 J기자, 21장은 E 기자가 썼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혼란을 겪는 것은 이런 여러가지 전승이 나타날 때인데 이것을 부분으로 읽지 말고 전체로서 읽으면서 두가지 입장을 비교하고 전승의 기자들이 서로 다른 삶의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들의 서로 다른 신앙고백은 오히려 우리의 설교를 더욱 풍부하게 해 줍니다. 구약의 지리나 문화 역시 그 자체로 읽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로 읽으면 그들의 신앙고백을 읽을 수 있고 그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구약학의 추세는 이 단계가 언제의 단편이며 언제까지 이 전승이 계속됐고 이 단락이 어떤 전승에 따라 쓰여졌는가를 연구하는 데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우리가 보는 구약성서의 마지막 형태를 어떻게 통시적으로 읽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에는 나무를 봤다면 요즘은 산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통시적 비평, 통전적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 현장이 느끼는 구약학의 거리감은 여전해 보입니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제게 언제나 요구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학이 과연 교회 컨텍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입니다. 구약학이 교회에 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어떻게 교회의 컨텍스트와 연결시킬 것인가입니다. 교회와 신학은 같이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목회자가 신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던지, 신학교가 목회자들을 찾아 가든지, 물리적 장소 이동이 필요합니다. 신학교는 목회 현장에 가서 목회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맞게 커리큘럼을 짜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월요성서학당이라든지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신학과 목회의 괴리감을 줄여 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목회자들이 설교와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약의 리소스를 제공해 주는 역할입니다. 일방적 강의가 아니라 대화와 포럼을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입니다. 과거 제가 공부했던 한신대에서는 한국신학연구소가 그런 역할을 했고 제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여전히 그 상아탑은 높겠지만 상아탑은 낮추라고 해서 낮춰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접촉점이 필요하겠지요.
-구약의 이민자의 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한인 이민신학의 발견에도 기여할 부분이 분명히 있겠지요?
신학을 정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Theology라는 단어도 하나님이라는 Theos와 이야기라는 logos의 합성어입니다. 이민신학은 이민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관한 신학입니다. 도대체 이민자들의 하나님은 누구인가입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들고 미국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가고 적응해 가는가에 관한 문제가 이민신학이 다루는 주제가 되겠지요.
이민신학이라고 하면 첫째, 한국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담론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민자는 소수자이며 차별당하는 존재입니다. 때로 어떤 이는 억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정체성을 갖고 만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관해 먼저 정리가 필요합니다. 억압하는 하나님인가, 억압받는 자를 위한 하나님인가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야는 이미 과거부터 이 문제를 놓고 몸부림치던 한국의 학자들이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이민신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둘째, 우리 이민자들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찬양해 왔는가를 찾아 봐야 합니다. 이민교회가 공동체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 왔습니까? 그저 라이드 해 주고 친교하고 그런 차원이 아닌 우리의 믿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 통전적 이해와 함께 구약학계의 화두는 소수자의 성서 해석입니다. 네이티브 어메리칸, 여권 신장주의자, 아시안 어메리칸, 흑인 등 소수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담론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지배적인 성서 해석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저는 다니엘서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데 다니엘이 포로기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소수자가 신앙 정체성과 관련된 저항을 통해 지배자를 이긴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강제 이민자였던 다니엘과 친구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이방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관한 이 연구 역시 성경을 소수자의 관점에서 읽으려는 노력입니다. 구약은 이민자의 책이기에 이민신학의 여러 고민거리에 관해 이처럼 풍부한 리소스를 제공해 줍니다.
-네. 목사님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세번째 인터뷰는 시카고루터란신학교(Lutheran School of theology at Chicago)에서 구약학을 공부 중인 김진양 목사다. 김 목사는 부산 경성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신대로 진학해 M.Div.를 마치고 목회자로 안수받았다. 거제도에서 목회하던 중 구약에 대한 이해에서 부족함을 느끼고 유학을 결심해 맥코믹신학교에서 M.A.T.S.를 마치고 루터란신학교에서 Th.M. 학위를 받았다. 현재 루터란신학교에서 구약학으로 Ph.D. 과정 중이며 논문 디펜스를 앞두고 있다. 시카고에서는 삼일교회에서 교육목사로 섬기고 있다. 루터란신학교는 진보교단인 미국복음주의루터교회(ELCA)에 속한 신학교이면서 그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 색채를 띠고 있다.
-구약학이 왜 필요한 학문인지부터 여쭈어 보겠습니다.
구약성서를 기독교인이 읽어온 지 2천년이 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라도 2천년동안 읽혔다면 충분한 연구의 가치가 있습니다. 구약성서가 2천년간 읽혔다는 말은 유대 히브리인들이 그것을 읽어 온 장구한 역사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기독교인이 읽어 온 역사만 따져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학을 공부하는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차원에서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첫째,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담은 교회의 책입니다. 우리는 흔히 구약성서가 역사를 담고 있는 책으로 보지만 이것은 사실 역사가 아닌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으로 꼽는 구절이 신26:5-9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이 구절을 부르고 암송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이었던 아람 사람 야곱이 방랑하다가 이집트로 내려가 크게 번성하고 왕성해졌다, 그리고 이집트인이 학대하자 하나님이 우리를 구해 주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형적 역사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지 역사를 이야기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냐”는 본질적 질문에 그들은 “우리를 이민하게 하고, 번성하게도 하며, 때론 노예로 만들고 또 때론 해방도 시켜 주시는 분,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땅도 주시고 자유를 누리게도 하시는 하나님”이란 고백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왕하18장에는 앗수르가 쳐들어 오자 히스기야왕이 기도했고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의 군사 18만5천을 쳐서 죽였고 산헤립은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문헌에 따르면, 산헤립이 쳐들어와 히스기야의 항복을 받고 20만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고 돼 있습니다. 성경을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두 기록물은 서로 충돌됩니다. 천사가 나타났다는 것보다는 앗수르의 역사적 기록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것이 사실인지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이 바로 그들의 신앙고백이란 점입니다. 하나님이 그 위기 속에서 우리를 살려 주셨다는 그들의 고백입니다.
시편 106편을 보면, 이것도 전형적인 역사기록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줄줄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입니까? 아니면 그냥 시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구약을 분석할 때, 신명기 사가, 역대기 사가, 예언자 전승, 왕조 전승 등 복잡하게 따지지만 이것은 모두 당시 구약이 전해진 그 자리에 있던 그 사람의 신앙의 고백이란 점은 동일합니다. 신명기 사가가 고백한 하나님이 다르고, 역대기 사가가 고백한 하나님이 다릅니다. 다르다는 표현은 틀리다는 말이 아니라 삶의 자리가 다르므로 고백도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사가의 바벨론 포로 이전은 철저히 왕조 중심적입니다.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을 다스리는 대리자입니다. 그러나 포로 이후는 왕이 없으므로 철저히 성전 중심적으로 바뀝니다. 왕을 세울 수 없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성전 중심 공동체에 대한 고백을 더욱 확실히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역사는 많아도 2백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약을 신앙고백의 책이라고 볼 때, 2천년간 고백되어 온 신앙을 조명해 보고 그들이 만난 하나님, 그들이 설명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누군지, 그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현재 삶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둘째, 구약성서는 신약성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삶과 사역을 담고 있는 초대교회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와 그의 메시지를 구약성서에서 보여준 예언에 대한 성취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마1장은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명하고 이는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려는 뜻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약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성서를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과거의 신앙 고백을 오늘의 현재의 삶에서 본다는 말이 무엇이죠?
예를 들면, 구약은 이민자의 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살았지만 메소포타미아 사람이었고, 후에 이집트까지 이주해 갑니다. 주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하며 강제이주가 일어납니다. 앗수르의 혼합정책으로 인해 민족과 민족이 섞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722년 이후엔 북이스라엘이란 것은 없지만 북이스라엘 사람은 있습니다. 주전 586년이 되면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또 강제로 이주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렘29장을 보면, 외국 땅에서 이민자로서 자신의 신앙적, 정치적 정체성을 지켜 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한인 이민자들이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 가야 하는지 고민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갔는지 그 하나, 둘, 셋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설교 적용은 상당히 쉽지 않은 주제로 꼽힙니다. 구약이 가진 방대한 내용뿐 아니라 복잡한 전승 구조, 히브리어에 대한 이해, 구약의 율법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구약의 본문을 설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장 목회에서 주로 신약을 주제로 설교하거나 구약의 한 사건, 한 단편, 때론 한 구절만 뽑아서 설교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는 하나님이 선포되는 것이 아닌,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설교는 하나님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포는 ‘케리그마’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나타난 인물을 중심으로 설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보다는 구약의 인물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셨고 어떤 은혜를 주셨는가를 설교해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요셉의 이야기를 설교할 때, 요셉을 강조합니다. 요셉이 뭘 했고 얼마나 지혜로웠고 얼마나 신실하고 믿음이 좋았는지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창37-50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의 설교는 이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당사자인 요셉조차 “나를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놓칠 경우, 이 설교는 요셉의 이야기, 정말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구약에서 신앙고백이란 것을 놓칠 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구약에서 복음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어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분노의 하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2세기 마르시온 학파는 구약을 없애자는 주장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이 말하는 바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고 나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사건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지 폐기하러 오셨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 속에서 복음을 찾아 내는 일도 설교자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겠지요. 레위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율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뭘 하고 뭘 하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법의 핵심은 레위기 19장에 나와 있는데, 이는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절기와 규례를 지키는 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의 생일과 추석, 설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지키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법의 궁극은 하나님 사랑, 인간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구약이 아무래도 이야기 형식으로 된 책들이 많기 때문에 설교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편적인 사례 인용으로 가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어떤 제안을 하십니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구약 연구는 본문의 단편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단편을 보기 때문에 자연히 구약 전체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구약학의 방향은 구약을 통전적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구약성서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메시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목회자들에게 통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통독은 무조건 막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구약 전체에 흐르는 맥을 찾는 것입니다. 구약은 오랫동안 전승되고 편집되면서 그에 맞게 맥과 흐름을 갖게 됐습니다. 구약이 가진 많은 메시지 중에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찾는 맥이 중요합니다. 통독을 하면 구약성서의 사가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 각종 에픽과 설화 속에 구체적으로 그들이 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보입니다. 이 통독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조리 읽는 게 아니라 창세기를 읽는다면 1장부터 50장까지, 적어도 1장부터 11장까지는 한번에 보는 것입니다. 1장부터 11장을 부분이 아닌 전체로 읽을 때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류는 타락했다입니다. 그 이후는 이 세상의 죄악이 너무나 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입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무지개를 보여 주시며 인류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그리고 10장까지 가면 인류의 계보가 나오면서 인류가 다시 번성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11장에 가면 바벨탑이 나오는데 바벨은 흩어진다는 뜻으로 하나님이 인류로 하여금 온 천하에 충만토록 하시는 축복을 말합니다. 창1장에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실현되는 순간입니다. 이렇게 전체로 읽는 것은 구약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됩니다.
또 저는 성도들과 성경공부를 할 때 토론식 수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토론을 하면 성도들이 안된다, 잘 못 배운다고 생각하는데 주입식으로 가르쳐서 그것이 몇 년을 가며, 삶의 변화에 얼마나 영향을 주겠습니까? 유대인들은 성경을 가르칠 때 한 본문을 놓고 두세 사람이 토론을 합니다. 토론 끝에 하나의 결론이 나기도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열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토론 후에 자신에게 필요한 성경 구절을 암송합니다. 우리는 유대 교육을 흠모하면서도 전의 과정은 생략하고 암송만 하려 합니다. 그러니 암송한 구절이 우리 삶을 터치하지 못하고 그 안에 하나님이 있기 어렵습니다.
- 이 문제와 관련해 구약학 연구의 추세가 실제 목회 현장에 어떤 도움을 준다고 보십니까?
구약은 확실히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구약학은 이 어려운 책을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어떤 경우는 한 단락에 두개의 전승이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한 단락에 서로 다른 삶의 컨텍스트가 있게 됩니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만 해도 1장과 2장에 두번 나옵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하고 또 다시 창조를 하신 것일까요? 창세기를 읽을 때 그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갈이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난 이야기도 창세기에 두번 나옵니다. 학자들은 16장은 J기자, 21장은 E 기자가 썼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 혼란을 겪는 것은 이런 여러가지 전승이 나타날 때인데 이것을 부분으로 읽지 말고 전체로서 읽으면서 두가지 입장을 비교하고 전승의 기자들이 서로 다른 삶의 현장에서 만난 하나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들의 서로 다른 신앙고백은 오히려 우리의 설교를 더욱 풍부하게 해 줍니다. 구약의 지리나 문화 역시 그 자체로 읽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표현했는지로 읽으면 그들의 신앙고백을 읽을 수 있고 그 공동체의 삶의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구약학의 추세는 이 단계가 언제의 단편이며 언제까지 이 전승이 계속됐고 이 단락이 어떤 전승에 따라 쓰여졌는가를 연구하는 데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우리가 보는 구약성서의 마지막 형태를 어떻게 통시적으로 읽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전에는 나무를 봤다면 요즘은 산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통시적 비평, 통전적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회 현장이 느끼는 구약학의 거리감은 여전해 보입니다.
그것이 학문을 하는 제게 언제나 요구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학이 과연 교회 컨텍스트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입니다. 구약학이 교회에 줄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어떻게 교회의 컨텍스트와 연결시킬 것인가입니다. 교회와 신학은 같이 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목회자가 신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던지, 신학교가 목회자들을 찾아 가든지, 물리적 장소 이동이 필요합니다. 신학교는 목회 현장에 가서 목회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맞게 커리큘럼을 짜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월요성서학당이라든지 그런 프로그램을 통해 신학과 목회의 괴리감을 줄여 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목회자들이 설교와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구약의 리소스를 제공해 주는 역할입니다. 일방적 강의가 아니라 대화와 포럼을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입니다. 과거 제가 공부했던 한신대에서는 한국신학연구소가 그런 역할을 했고 제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여전히 그 상아탑은 높겠지만 상아탑은 낮추라고 해서 낮춰지는 것이 아니라 양자간의 접촉점이 필요하겠지요.
-구약의 이민자의 책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한인 이민신학의 발견에도 기여할 부분이 분명히 있겠지요?
신학을 정의하면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Theology라는 단어도 하나님이라는 Theos와 이야기라는 logos의 합성어입니다. 이민신학은 이민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야기 하느냐에 관한 신학입니다. 도대체 이민자들의 하나님은 누구인가입니다. 한국인의 정체성을 들고 미국에 온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가고 적응해 가는가에 관한 문제가 이민신학이 다루는 주제가 되겠지요.
이민신학이라고 하면 첫째, 한국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에 관한 담론을 형성해야 합니다. 이민자는 소수자이며 차별당하는 존재입니다. 때로 어떤 이는 억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 정체성을 갖고 만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관해 먼저 정리가 필요합니다. 억압하는 하나님인가, 억압받는 자를 위한 하나님인가라는 관점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분야는 이미 과거부터 이 문제를 놓고 몸부림치던 한국의 학자들이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이민신학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둘째, 우리 이민자들이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찬양해 왔는가를 찾아 봐야 합니다. 이민교회가 공동체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 왔습니까? 그저 라이드 해 주고 친교하고 그런 차원이 아닌 우리의 믿음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즘 통전적 이해와 함께 구약학계의 화두는 소수자의 성서 해석입니다. 네이티브 어메리칸, 여권 신장주의자, 아시안 어메리칸, 흑인 등 소수자들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관한 담론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지배적인 성서 해석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저는 다니엘서에 관해 연구하고 있는데 다니엘이 포로기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소수자가 신앙 정체성과 관련된 저항을 통해 지배자를 이긴 이야기입니다. 일종의 강제 이민자였던 다니엘과 친구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이방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가에 관한 이 연구 역시 성경을 소수자의 관점에서 읽으려는 노력입니다. 구약은 이민자의 책이기에 이민신학의 여러 고민거리에 관해 이처럼 풍부한 리소스를 제공해 줍니다.
-네. 목사님 인터뷰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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