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생주의 신학’을 말한다(On Theology of Combiosism)

□간증으로 시작하면

연구자의 사역은 1968년부터 10년 동안 서울신학대학교를 섬겨 오는 데서 시작되었다. 미주에서는 미주성결대학교 초대 총장과 교수로 6년간 시무했고, 아주사퍼시픽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현장목회론’으로 목회 후보생들을 10년 가까이 지도해 오고 있으며 풀러신학대학원에서는 목회학박사학위 논문지도교수로도 섬기고 있다. 전공은 기독교교육신학에 강조점을 둔 실천신학이다.

한편 미주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32년간 담임목회를 해 오고 있으며, “생산능력이 있는 모범적 자립교회”를 사역하겠다는 당초 목표를 이루었다. 미주성결교단의 총무와 총회장으로서도 사역했다. 그리고 남가주교회협의회장, 남가주한인신학대학협의회 회장 등도 역임했다.

그 동안 목회현장과 신학연구실을 오고 가면서 고민과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었다. 그것은 “신학 있는 목회, 목회 있는 신학”으로 요약되는 지혜를 터득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고,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고 말하지만 이 말을 뒤집어, “신학 있는 목회는 갈 길이 명확하고, 목회 있는 신학은 열매가 충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같은 작업을 통하여 12개 항목으로 기본교리를 요약한 “기독교미주성결교회 교리적 선언”을 비롯하여 교단의 교리문답, 예식서와 미주한인교회가 사용하는 이단판별지침, 목회자윤리강령, 남북통일선언문 등의 문서를 초안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결교회의 고백적 교리와 신학을 “기독교 개신교 웨슬리안사중복음주의”로 요약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어 성경 <개정개역판> 번역, 찬송가 가사 수정, 주기도문 번역 등에도 다소 공헌한 바 있다. 그리고 사도신경과 십계명 새 번역 시안을 내어 놓기도 했다.

목회현장에서 신학과 씨름하면서 수많은 조류의 신학과 역사적 교리들이 안고 있는 걸림돌과 디딤돌들에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2009년 6월 초 과정신학 세미나에서 이 분야에서 대표 신학자인 죤 캅(John Cobb, Jr.) 박사의 발제를 목회자 입장에서 논평하는 일에 참여했던 경험이 함생주의 신학형성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함생주의 신학은 연구자의 인생 전체를 집약하여 정리한 표제어이다. 소년시절 처음 예수 믿을 때 겪은 교회의 분쟁과 심한 몸싸움을 목격한 고통이 씨앗이 되었지만 근원적으로는 이 땅에 태어나서부터 험악한 세월 속에서 살아남은 인생 체험, 신앙생활, 언론인과 교육자와 목회자, 그리고 조각글 작가와 교육신학자 또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생활 등이 모두 농축되고 종합되어 형성된 개인적인 고백신학이다. 그런 까닭에 아직은 모색단계의 실험신학이라 할 수 있다. 특히 30년 목회생활을 하며 우리 교회와 여러 교회 그리고 연합집회 등에서 족히 1만 번 가량이나 외쳐온 설교를 통하여 확신 있는 신학사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설교는 영혼을 살리고, 몸을 살리고, 인격을 살리고, 관계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고, 자연을 살리고, 그것을 위하여 교회를 살려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하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특히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말씀, 삶, 죽음, 부활을 통하여 나타내 주신 핵심 말씀이 함생주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삼위일체 신론에서 출발
함생주의(咸生主義, combiosism)란 “모두 사는 것, 함께 사는 것, 끝까지 사는 것, 온전히 사는 것, 그리고 남을 살리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사상체계이다. 함생의 ‘함’은 “다 함”으로 ‘모두 다’를 뜻하지만 쉽게 한국말의 ‘함께’ 할 때 ‘함’으로 이해함이 좋다. 그러나 아시아가 한자 문명권이라는 점에서 ‘咸’을 쓴다. 영어의 com은 라틴어 cum에 뿌리를 둔 함께라는 뜻이고 bios는 희랍말의 생명, 재산, 목숨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biology(생물학)의 뿌리가 되는 말이다.

신론(神論)은 신학의 본질적 영역이다. 신학이나 교리는 하나님의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고 또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곧 삼위일체 신론에서 출발되어야만 한다. 한국말로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매우 익숙해져 있지만 니케야 신조 등을 따르면 삼위일체와 ‘일체삼위’를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신론’과 ‘위로부터의 신론’을 뜻한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 곧 일체삼위 하나님은 ‘함생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된다. 최근의 신학자들이 삼위일체 신론을 ‘community of God' (하나님의 공동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삼위일체적으로, 그리고 일체삼위적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시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아버지, 아들, 성령이 함께 계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페리코레시스 삼위일체론’(通在的 삼위일체론이라고 이종성 박사는 번역했다)인데 이것이 바로 함생주의 신학의 기초가 된다.


이 같은 함생체적 하나님 이해로부터 우리는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몇 개의 실례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언약을 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집트와 바벨론 등에서 이방인과 함께 살게 하셨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심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함생, 인간과 인간의 함생을 선언하셨다. 또한,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17:11)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바로 삼위일체/일체삼위 하나님이 함생체이신 것처럼 인간들도 함생체가 되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창1:26-28)이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바로 그 분이 하나님과 인간의 함생체이심을 뜻하는 것 아닌가.

□함생주의적 구원론
성경의 핵심적 기본사상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라는 데 기독교 전체의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구원의 내용이나 과정 등에는 심한 이견이 있어 왔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개혁자들 사이에는 구원의 내용과 방법의 차이 때문에 사람의 생명까지 희생된 전쟁까지 벌어졌었다. 구원은 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그 구원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여기에서도 함생주의 구원론의 절실한 필요성이 제기된다.

그런데 모든 구원론은 함생주의로 수렴되고 또 되어야 한다. 구원을 회개, 회심, 속죄, 칭의, 중생, 성화, 그리스도인의 온전 등으로 주장하는 것은 수직적 함생주의를 말한다. 수직적 함생주의란 사람이 성삼위 하나님과 함께 함생체를 이루는 것을 뜻하며 ‘임마누엘’이라는 한 마디 말이 바로 수직적 함생주의를 효과적으로 대표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구원을 정치/경제적 해방이나 평등, 인간화, 화해, 윤리적 삶 곧 사랑이나 선행 등으로 이해하는 신학적 주장들이 있다. 이것들은 수평적 함생주의를 강조하는 입장들이다. 자유주의, 신자유주의, 해방의 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민중신학을 포함), 과정신학, 포스트모더니즘적 신학 등이 여기에 속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생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성결교회 신학과 사역의 미래가 보인다. 성결교회는 수직적 함생주의를 강조한 점에서는 매우 모범적이다. 그러나 수평적 함생주의에는 상대적으로 부정적이거나 무관심해 왔다. 그러므로 앞으로 성결교회는 수평적 함생주의 곧 우리와 신학적 입장을 달리하거나 심지어 종교적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과도 함께 돕고 협력하는 일에 적극 나서야 한다. 미래신학에 관심을 가진 학자들은 기독교 구원론이 앞으로 복음주의적 개신교회의 ‘이신득의론’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이행득의론’이 통합된 ‘사랑구원론’의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성경 요한문서들이 강조하는 사랑구원론을 뜻한다.

구원론에 있어서 함생주의 신학의 특징은 생태신학(ecological theology)이 제기하는 문제들까지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유용성이 발견된다. 노아의 방주 곧 구원의 방주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각종 짐승들도 함께 있었다는 점,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실 때에,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막1:13)는 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는 말씀에서 ‘만민에게’는 바로 ‘모든 피조물’ 혹은 ‘온 창조세계’를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앨버트 슈바이처의 생명경외(reverence for life) 사상도 함생주의 신학의 한 부분이 된다.

□ 함생체로서의 교회
복음주의 신학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운동(Reformation)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흔히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아무런 성찰 없이 사용하는데 사실 그것은 ‘교회개혁운동’이라고 해야 한다. 그 때는 종교라면 기독교를 뜻했지만 그렇더라도 그 때 개혁을 시도한 것은 기독교를 대상삼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대상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개신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이 같은 교회개혁운동을 일으키면서 몇 가지 부작용도 감수해야 했다. 최대 부작용은 바로 교회론의 약화였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의 거룩성이 심한 손상을 입게 되었고 그래서 나타난 대표적 질병이 바로 교회들의 추악한 갈등과 분열이었다. 그로 인하여 교회의 공신력이 크게 떨어졌으며 전도의 문을 막고 말았다.

뜻있는 교회지도자들은 이것을 철저히 반성하여 뒤늦게나마 두 가지 처방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에큐메니컬 운동 곧 교회일치운동이 그 한 축이요 교회성장운동이 다른 한 축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운동은 모두 함생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하나님 나라와 아무 연관이 없다는 주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교회는 어느 모로나 하나님의 나라를 기본요소로 삼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교회가 하고 있는 사역들, 곧 예배, 성례전, 교육, 선교, 봉사, 친교 등 모든 일들은 계시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바로 삼위일체/일체삼위 하나님과 온 인류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이 함생하는 나라임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 살아남기 위하여
어떤 사상이 신학의 기초가 되려면 적어도 계시론, 신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들과 깊이 연관되어야 한다. 따라서 위의 설명으로 함생주의 사상은 신학의 주제가 되기에 넉넉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혹자는 상생신학을 주장하기도 하나 그것은 과정신학 안에 갇혀 있다는 한계성도 있고 또 ‘야합’적 상생도 있어 신학의 틀로는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

신학이 되려면 또 하나의 기초 곧 장황(context)과 연관되어야 한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인류와 우주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하는 신학이어야 한다. 삶의 현장에 적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인류의 가장 큰 문제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바로 죽음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 죽음은 하나님과 함생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서 해결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나 집단적 죽음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지난 20세기 두 세계대전에서 인류의 생명은 엄청나게 파괴되었으면서도 아직도 인류는 그 해결의 길을 마련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특히 공산주의 혁명과정에서 1억명 이상의 생명이 죽었으면서도 함생의 길을 찾는 일이 지지부진한 편이다. 게다가 이제는 새뮤엘 헌팅턴의 주장처럼 ‘문명충돌’ 곧 종교문명의 충돌로 온 인류의 생명이 심히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함생주의 신학을 앞세워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핵전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생태계 파괴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기독교와 이슬람교와의 싸움에서 양쪽 모두 살아남기 위하여, 민족주의의 갈등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함생주의 깃발 아래로 모여야 한다. 그래야만 모두가 전멸하는 ‘함사주의’ 비극에서 벗어나, 모두 살고, 함께 살고, 온전히 살고, 끝까지 살고, 자기를 죽여 남을 살리는 함생주의 문명이 이 지구 위에 건설이 시작된다.

□ 요약과 결론: 함생주의 신학의 특징들
1.함생주의 신학은 성경말씀과 역사와 자연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최고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것에 가장 큰 초점이 있다. 생명을 살리되, 모두 살리고, 끝까지 살리고, 함께 살리고, 온전히 살리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신학이다.

2.온전한 구원의 신학이다. 개인구원만 강조하는 보수신학과 사회구원을 강조하는 진보신학, 그리고 환경구원을 강조하는 생태신학을 종합할 수 있는 신학이다.

3.삼위일체 하나님을 성부, 성자, 성령의 함생체로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의 함생체로 이해하며, 교회를 하나님과 함생하는 형제자매의 함생체로서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 자연과도 함생하려는 것을 최고 사명으로 가진 함생체로 이해한다.

4. 회개, 칭의, 중생, 성화와 성결, 영화의 전통적이며 개인적 구원을 하나님과의 함생(수직적 함생)이라는 시각에서 재조명하며 특히 이것으로 영성의 기초를 삼는다.

5.전도와 선교의 전략에 일대 변혁을 일으킬 기초가 된다. 전도와 선교는 바로 수평적 함생이기 때문이다.

6.기독교 에큐메니즘과 종교적 에큐메니즘의 기초가 된다.

7.의사소통성(communicability) 곧 교육성이 높은 신학이다.

8.신학의 외연(外延, extension)을 기독교에 국한하지 않고 온 우주, 전 역사까지로 확대한다. 따라서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모두 아우르는 신학이 된다.

9.미래형 신학이다. 인류는 하나님과의 함생, 이웃과의 함생, 우주자연과의 함생을 시급히 이룩해 내지 못하면 멸망의 붉은 용에게 삼켜질 위험성이 너무도 높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기독교가 그 기반을 제공하는 함생주의 신앙을 시작으로 함생주의 윤리, 함생주의 사상을 삶의 패러다임으로 삼아야 한다.

10. 그래서 인류문명의 패러다임(paradigm)을 바꿀 수 있는 머릿돌 사상이라고 하겠다. 곧 함생정치, 함생경제, 함생사회, 함생문화, 함생역사관 등으로 인류문명을 재구성하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다.

11.상생신학(theology of symbiosism)이 이왕에 있어왔지만 그 제한성을 함생주의 신학이 보완한다.

12. 전쟁, 갈등(conflict), 약육강식의 경쟁(competition), 협력(cooperation),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 등은 인간 삶의 당연한 모습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함생을 대전제로 할 때 생명의 손상을 극소화할 수 있다.

13. 개인과 사회의 우선순위가 늘 논쟁의 불씨였으나 함생주의 사상에서는 “개사주의”(個社主義)로 종합하게 된다. 하나님의 존재가 복수적 단수 혹은 단수적 복수이고 하나님의 형상은 개인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 형상(social image of God)도 있기 때문이다.

[] 참고 사항
1.개략적이며 선언적인 내용만 적었으므로 참고문헌이나 각주 등은 생략했다.
2. 함생주의 사상이나 신학에 관하여는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기독교 신앙과 함생주의 문명 건설” 반석 (서울사대 기독학생 동문회: 2009)
“함생주의 신학을 말한다” 활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2010년도 4월호 게재 예정)
“함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조각설교 블로그 unilee4u.
“예수님은 함생주의자” 미주성결교단 창설 30주년 기념설교집 기고.

(제22회 성결포럼 발제 내용, 2010년 3월 22일 오전 10시, 미주성결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