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밥을 사는 그날까지, 남자들이여 일어나라!”

‘남성인권보장위원회’까지 등장(?)한 세상이다. ‘짐승남(男)’에 많은 여심(女心)이 열광하고는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몸’에 한정된 이야기다. 가뜩이나 땅 좁은 우리나라에서 ‘남성다움’이 설 땅은 더욱 비좁기만 하다.

이러한 때에 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와일드 하트(Wild Heart)>의 저자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는 “남자의 가슴에 새겨놓은 하나님의 거룩한 야성을 회복하고 마음과 열정이 이끄는 대로 거침없이 나아가라”고 외친다. 그는 기독교 문화에서 오랫동안 금기시됐던 인간 내면의 ‘욕망’을 긍정적 관점에서 탐구해온 작가다.

일단 반응은 뜨겁다. 남성인지 여성인지 모를 독자들은 3백만에 달하고, 아마존에는 장기 베스트셀러로 등록돼 있다. 저자는 “하나님은 남성이었다”고 과감하게 주장하면서, 모험을 즐기고 구속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형상을 닮은 ‘남자’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위험을 줄이고 안전한 곳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성향이 전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러한 예로 물맷돌만을 가지고 거인과 싸우러 나간 양치기 소년 다윗과 3백명의 용사를 데리고 싸움터로 나간 기드온 등 우리가 ‘기적적’ 또는 ‘비현실적’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성경 인물들을 생동감있게 활용한다. 그는 “예수님은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단정히 빗고 조용한 목소리로 소곤대며 대립을 극구 피하는 창백한 제단 지킴이가 아니다”며 “그리스도는 테레사 수녀보다는 <브레이브 하트>의 윌리엄 월리스에 더 가까운 모습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다소 ‘신학적’일 수 있는 이야기도 ‘하나님의 남성성’ 시각에서 접근한다. 하나님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안전하게 지킬 생각으로 과장을 일삼았다”며 “하나님이 체스판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전능자,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말만이 아니라 우리 말까지 움직이는 전능자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심어주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하나님은 그래서 심지어 당신을 거부할 자유까지 허락했다. 저자는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는 근본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뜻은 아니다”며 “하나님이 체스판의 말을 모두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가정에 근거한 삶을 거부하셨고, 인간을 그 분의 역사에 참여시켜 인간의 선택이 하나님의 역사에 크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락하셨다.

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은 또 ‘낭만주의자’이시다. 하나님에게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신부’가 있고, 질투하시는 ‘연인’이시다. 자신의 백성과 그들의 자유를 위해 질투하시고, 하늘과 땅을 움직여서라도 기꺼이 신부를 지킬 준비가 돼 있으시다.

저자는 이러한 남성성을 교회가 ‘거세’한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교회는 ‘유다의 사자’의 발톱을 아주 효과적으로 잘라버리고, 유다의 사자를 허약한 목사들과 독실한 여자들의 충실한 애완동물로 전락시켰다”는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의 말을 인용해서다.

저자는 “우리는 무슨 일이든 잘 풀리리란 확신이 없을 때는 용기내 말하지 않는다”며 “성경이 육신, 옛 사람, 죄많은 성품이라 칭한 것은 언제나 가장 쉬운 길을 찾으려는 남자들에게 감춰진 타락한 아담의 모습”이라 말한다. 또 “언제부턴가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비치고 있고, 우리는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수단을 필사적으로 원하고 있다”며 “우리는 최첨단 마케팅 기법과 최신 경영법을 목회에 적용하고 있는데, 이런 합리적 원칙에 집착하는 교회의 강박관념은 하나님과의 진실한 대화를 등한시한다는 문제를 야기한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묻는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사회는 남성을 평가하는 지표로 ‘안정된 직장’으로 대표되는 재정적 능력을 최우선시하고, 교회는 ‘도덕적 인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남자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들만 선사한다. 남성들은 욕망을 가슴 깊이 묻은 채 살아가게 됐고, 목숨을 걸 만한 커다란 ‘전투’를 잃어버린 남자의 용맹스러움은 퇴화한 채 스포츠를 비롯한 각종 ‘게임’으로 그 분을 달랠 뿐이다.

남자들은 기사처럼 보이고 싶어하지만 기사처럼 피를 흘리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남자의 힘이 어디에 필요한지도 모르고, 여자가 자기를 위해 싸워달라고 요구할 때 한참을 머뭇거린다. 여전히 자기 목숨을 구하는 데 급급할 뿐,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때 느끼는 황홀한 기쁨을 잊은 지 오래다. 서해 초계함 침몰 사태 때 순직한 한주호 준위는 이를 온몸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결론이다. 저자는 모험이 넘치는 ‘남성적인’ 삶을 위해 ‘어떻게’라고 질문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그는 “‘어떻게’라고 질문하는 것은 내가 방법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 방법을 믿지도 않고 과감히 시도해보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라며 “‘어떻게’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실 것”이라고 전한다.

한 남자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의 진실한 가슴에 쓰여 있다. 깊이 감춰진 욕망의 경계를 넘어설 때 그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모험으로 가득한 삶, 즉 위험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지옥으로 가는 길도 좋은 말로 포장돼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