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시편 32장 1절~7절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준비하면서 제 마음에 가장 먼저 떠오른 주제는 ‘용서’였습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주님을 묵상하며 2010년에 계속주시는 메시지가 바로 ‘용서’였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날 위해 죽을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알고 감사해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유난히 올해 주시는 마음은 예수님의 고난을 ‘용서받음’과 ‘용서함’의 관점에서 이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많은 경우 용서란 단어는 용서함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출발은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받음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을 보여줍니다. ‘용서 받은 자가 가장 자유롭다’ 그래서 오늘은 먼저 이 용서받음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용서받은 자가 복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700만 불 로또를 맞은 사람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은 사업에 성공하고 원하는 대학에 붙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배우자 잘 만나 인생 편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는 복 있는 사람은 바로 ‘용서받은 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2절 말씀처럼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않는’ 곧 하나님에게 용서받는 것이 복 있는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바로 당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음이 왜 복일까요? 용서받았다는 말은 나의 죄가 없어졌다는 말이며, 죄가 없어졌다는 말은 내가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용서’라는 단어는 ‘죄인으로부터 죄를 분리해 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죄를 분리해 내어 던져버리는 것이 용서입니다. 사람을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만 던져버리는 것입니다. 사람까지 던져 버린다면 그것은 "처벌"입니다. 처벌은 사람과 죄를 함께 미워합니다. 하지만 용서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죄인으로부터 죄를 분리시킴으로 사람을 다시 사람답게 만드는 "회복"이 목적입니다.


결국 용서받음은 죄로부터 자유,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용서받음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용서함으로 이어지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음을 경험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받은 자야 말로 온전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용서받은 자는 분열과 상처와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한 파괴된 공동체를 화목으로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복 있는 사람입니다.

둘째. 용서받지 못한 자는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3~4절을 보면, 용서받지 못한 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너무나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때 일어나는 신체적 현상은 “뼈가 쇠하고 진액이 빠지는 것”과 같다고 설명합니다. 많은 경우 죄와 허물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피하려 합니다. 죄로 인한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인한 고통을 직면하지 않고 피하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직면하지 않고 피할 수 록 이것이 마음에 더 깊은 병을 만들어 가며 더욱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용서받지 못한 마음이 우리를 끊임없이 두려움과 불안과 우울함으로 그리고 사과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방귀를 뀐 놈이 성낸다고 되레 상처를 잘 받게 됩니다.

넘기고 그저 피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더 아프게 만들어갑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태양 앞으로 나오십시오. 용서받음은 ‘외면과 도피가’이 아니라 ‘직면과 인정’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너무 힘들어합니다. 그저 미안하다하면 될 일을 말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자존심과 인생이 걸리는 것이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이야기입니다. 저에게 가장 큰 약점과 문제 중에 하나는 자신의 수치와 문제에 직면하지 않고 끊임없이 합리화 시키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께서 이번에 저에게 주신 가장 큰 평안은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말할 때였습니다. 예전에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말하는 일은 죽는 것처럼 싫었고, 어떻게 하든 자기 보호 메커니즘이 발동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잘못했습니다’고 인정하는 것을 은혜로 알고 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실수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완벽한 사람. 아무도 없지요. 완벽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왜 이리 우리는 모를까요? 오히려 이건 제가 잘못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뼈를 쇠하게 하고 진액을 마르게 하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오히려 합리화시키고 피하기만 하는 것이 더 뼈를 상하게 하고 진액을 마르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목사로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일이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길 소망합니다. 목사도 얼마든지 오판하고 자기 과신에 빠질 위험을 가진 존재니까요. 최근에 다시 느꼈지만, 여전히 연약한 인생임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주신 마음은 “네 오판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짐해봅니다. 앞으로 잘못한 일이 있다면, 자존심 내세우지 않겠습니다. 사실 앞에선 생명을 걸어야겠지만, 자신의 잘못 앞에선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목사는 용서하는 사람이 아니라 목사역시 용서받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발견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허물을 자복하고 내 죄를 아뢸 때 내 죄악을 숨기지 않을 때 무엇이 약속되어있습니까? ‘곧’ 사하셨다고 합니다. 도피와 외면은 순간적인 평안을 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을 긴 고통을 줄 것입니다. 하지만, 직면과 인정은 그 순간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즉각적인, 확고한’ 자유와 회복을 허락할 것입니다.

셋째. 용서받은 자는 자유 합니다.

6~7절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홍수가 와도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시고, 환난 날의 보호자시며, 구원의 노래로 우리를 둘러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죄를 자복하면 거리가 멀어지고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는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제발 염려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용서하지 못할 어떤 큰 죄악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단이 여러분을 속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런데 이 용서가 왜 더 놀라운지 아십니까? 이 용서가 위대한 것은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까지 용서하셨다는 점도 놀랍지만, 스스로 회개하지도 않은 자들, 여전히 조롱하고 머리를 흔들며 침을 뱉어대는 그들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용서하셨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근거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부끄러움과 죄가 있다할지라도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 주님은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시며,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죄를 지었어도 예수님의 죄 사함의 능력을 막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자는 죄와 수치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맺으며
하나님의 용서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제한 당한 하나님의 용서는 없습니다. 한없이 큰 우리의 죄는 그저 한 없이 큰 용서를 받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억할 것은 우리의 용서받음의 근거이신 예수님은 그들이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지만 먼저 용서하는 분이시라는 점입니다. 내가 죄인중의 괴수라 할지라도 한없는 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용서를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나를 위해 죽어버리신 예수님 앞에 먼저 깊은 용서받음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