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큰 별이 또 하나 지고 말았다. 한국인 사상 최초의 성공회 주교이자 한국교회의 일치와 연합에 온 생애를 바쳤던 이천환(바우로) 주교가 지난 26일 오후 8시(한국시간) 별세했다. 향년 88세. 사제의 길을 걸은 지 56년, 주교가 된지 44년만이다.

1890년 영국인 선교사 존 코프 주교의 선교로 시작된 대한성공회는 1965년 당시 이천환 신부가 주교로 성품되며 한국인 주교 시대를 열게 됐다. 이 주교는 대한성공회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주교 시대를 열면서 동시에 성공회의 자전, 자립, 자치의 선교 정신에 따라 한국 성공회를 이끄는 수장이 됐다. 그는 어려운 대내외적 여건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사회의 발전과 통합을 위하여 평생을 헌신함으로써 오늘날 대한성공회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활동은 성공회 안에만 갇히지 않아, 다양한 교계 연합체에서도 헌신적으로 활약했다.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성공회·천주교 재일치추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74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코만더 훈장, 198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기도 했다. 그는 25년간 연세대학교 이사장을 맡으며 기독교 사학의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의 장례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으로 치러지며,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됐다. 한편, 시카고 지역 성도들도 이 주교를 추모하며 별세추모미사를 3월 30일 오후 8시 성공회 한마음교회(307 W. Hintz Rd. Prospect Heights, IL 60070, 847-539-0590)에서 주인돈 신부 집전으로 드린다.

한편, 주인돈 신부는 이 주교를 기리며 “이천환 주교님, 영검을 남겨 주십시오”라는 애도의 글을 발표했다.

“이천환 주교님, 영검을 남겨 주십시오”

이천환 주교님께서 지난 3월 26일에 별세하셨다. 나는 학생으로서, 초등학생부터 시작해서 대학생까지, 이천환 주교님을 만나고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주교로서 선비적 기풍을 갖고, 고고한 인품의 소유자로 기억된다. 대한성공회 초대 한인주교로서 대한성공회의 자립적 기초를 놓으셨고, 한국교회에서 교회 일치를 위해서 애를 쓰셨고,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서 25년을 봉직하시면서 교육과 사회를 위해 일하셨다.

주교님은 나에게 평생 기억하고 또 실천할 사건을 남겨주신 분이시다. 내가 성공회 신부가 되겠다고 결단하고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1981년에 입학을 하고 주교님께 인사차 주교관을 들른 적이 있다. 내가 강화 장화리 시골 출신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신 주교님께서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고, 좋은 신부가 되라고 격려하여 주셨다. 인사를 마치고 나오는 나에게 주교님께서는 미리 준비하신 봉투를 건네 주셨다. 나중에 펴보니 한지로 싼 3만원이 들어가 있었다. 3만원, 그때는 대학생이 읽어야 할 수준의 보통 참고 도서는 3천원 정도 내외였다. 나는 주교님의 뜻과 사랑을 기억하여 3만원으로 모두 책을 샀다. 그리고 그 이후 1학년이 끝나고 다시 주교님을 찾아 뵈었다. 나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주교님은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런데 이번에도 주교님은 봉투를 준비하셔서 3만원을 나에게 주셨다. 나는 그 돈으로 역시 책만 샀다. 그 이후 대학생 시절에 주교님을 다시 방문하였는데 주교님은 한 번 더 3만원을 주셨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때마다 주신 돈으로 오직 책만 샀다. 지금도 주교님께서 주신 돈으로 산 책을 몇 권 가지고 있다. 주교님은 공부하는 대학생, 신부가 되겠다고 하는 시골출신 학생에게 사랑과 격려하는 의미로서 돈을 주셨던 것 같다. 나는 그 돈으로 모두 책을 샀고 정말로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였다. 신부가 되어 처음으로 서울대성당에서 보좌사제로 시무할 때에 서울대성당에는 신학생 3명이 있었다. 나는 주교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신학생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이 주교님은 지금도 나에게 공부하는 후배들을 격려하도록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주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공부하는 후배들을 제대로 격려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주교님 별세 소식을 들으면서 못내 부끄러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사제서품을 받고 약 10년쯤 지났을 때에 성직생활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성직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그 질문을 20년 이상 성직생활을 한 사제들을 만날 때마다 1년이 넘도록 물어 보았다. 그중에 지금까지 가슴에 기억하고 실천하려고 애를 쓰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어떤 미국인 신부가 나에게 전해 준 말이다. 그 신부는 뉴욕 교구장 주교였던 분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라면서 세 가지를 나에게 말해 주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사랑하며, 구두를 빤짝빤짝 빛나게 닦으세요.” “구두를 반짝반짝 빛나게 닦으라.” 무슨 말일까? 그것은 자기관리와 훈육 즉, discipline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1학년 때에 인천내동교회에서 견진(견신례)을 받았다. 처음 영성체(領聖體)를 하면서 놀란 것은 그분 손에서 묻어나는 향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분은 세심하게 자기를 관리하시면서, 성체를 베푸는 당신 손을 향기가 있는 손으로서 하기 위하여 향수를 뿌리신 것으로 알고 있다. 내 기억 속에 이천환 주교님은 자기관리가 철저하신 분이셨고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쓰신 분이셨다. 2차대전 때에 조지 패튼 장군은 자기관리와 군기에 철저하고 독특한 당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냈다. 이천환 주교님은 주교로서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선비적 학자로서, 깊은 자비와 포용적 사랑의 인격자로서 당신 자신의 스타일을 갖고 계셨던 주교님으로 기억된다. 나는 자기관리에도 철저하지 못하고 나만의 스타일도 갖지 못하였다. 이천환 주교님께 구두를 어떻게 그렇게 반짝 반짝 빛나게 닦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었는데 그 기회가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누가 나에게 성공회의 신앙적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나는 서슴없이 성공회의 신앙적 특징은 “포용성”(comprehensiveness)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성공회의 신앙적 특징은 중용(via media)이라는 말로 번역해왔는데 나는 그것을 포용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성공회 신부로서 이천환 주교님께서 가지신 그 포용성의 덕성을 닮고 싶다. 이천환 주교님은 연세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서 25년간을 봉직하셨다. ‘연세대학교의 재단 이사장으로서 25년을 봉직한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가까운 주변 분들에게 여쭤 보았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은 이천환 주교님의 중재와 포용의 능력이라고 들었다. 그분은 뛰어난 중재와 포용의 능력으로 연세대학교 재단이사회를 이끄셨다고 한다. 이천환 주교님은 성공회의 신앙적 특징인 포용성을 당신의 인격적 특징으로 체화(體化)시키시고 삶의 현장에서 진리로서 체현(體現)하신 분이시다. 나는 사목을 하면서, 그리고 조직체의 일원으로서 참여하면서 그 포용성의 인격을 발휘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가를 경험하고 있다. 이천환 주교님께서는 이제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주교님께서 지니셨던 포용성, 그 인격적 특성과 신앙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나에게 조금이나마 영검을 주십시오’ 하고 엘리사처럼 간구하고 싶다. (열왕기하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