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종파를 초월해서 애도의 물결이 한국만 아니라 세계로 번졌다.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광분하는 세상을 향해 무소유를 강조하시고 그 자신이 무명옷 한 벌에 밥그릇 몇 개 수저 한 벌로 사셨기에 더욱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장례식을 하지 말고 입은 옷 그대로 관도 없이 대나무 위에 놓고 다비하라는 유언대로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무소유’는 소유욕에서 탈피하여 모든 만물이 같이 조화를 이루자는 주장으로 180쇄나 찍어 많은 분들의 호응을 받았다. 사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소유욕에 끌려 살고 있다. 채 눈도 뜨지 못한 신생아는 손에 잡히는 대로 자기 입으로 집어넣는다. 그리고 일생동안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라도 더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기 위해 이리 저리 뛴다. 소유욕은 끝이 없다.

마치 양 99마리를 가진 부자가 그 앞집의 가난한 노부부가 한 마리 양을 친 자신처럼 키우는 것을 알고는 그 양 한 마리를 빼앗아 100마리를 채우는 것이 너와 나 인간의 소유 본능이다. 그런 인간의 욕심을 신랄하게 지적한 분이 스님이었다.

서울 성북구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이 있었다. 7천 평에 이르는 대지에 40동의 건물을 가진 주인 김영한 할머니는 그 엄청난 재산을 법정 스님께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스님은 한 마디로 사양했다. 10년을 졸랐으나 계속 사양하자 그 재산을 조계종 송광사에 기증하고 결국은 훈련원 길상사가 되었다. 길상사가 준공되는 1997년 12월 14일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모인 자리에서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저는 이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수행과 교화는 호화스럽고 흥청거림 속에서는 결코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병들기 쉽지만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합니다”라는 메시지는 소유욕에 미친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소리였다.

기독교의 원조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한국이나 세계의 종교는 교세가 확장 될 때에 재산이 천문학적으로 증식되었다. 한국의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는 절이나 기도원이 꼭 있다. 종교가 민생을 구원 한다는 핑계로 많은 물질을 소유하게 되고 여기에 귀족화되고 또한 종교의 타락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무소유자로 살수는 없다. 시집 장가가고 애들도 낳아서 공부시키고 세금도 내고 등등 사회생활에 돈은 좋은 매개체다. 돈 자체가 악이 아니다 (돈을 소유의 대표로 한다)즉 돈이 우상이 되고 심지어 돈 때문에 살고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비극이다. 물론 소유욕에는 물질만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 또 다른 욕심도 포함된다.

묘한 것은 인간에게는 소유욕과 무소유욕도 있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창조욕이 있다. 내가 노력을 해서 다른 사람이 득을 보고 행복해진다면 그 자체가 자신의 행복인 것이다. 본인은 빌 게이츠를 그런 사람의 대표자로 생각한다. 컴퓨터의 황제로써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또한 천문학적인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그는 그 번 돈으로 가난과 빈곤 퇴치운동에 앞장서서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도 아프리카의 빈민 퇴치를 위해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것이다. 미국에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사람 말이다.

나는 한인 사회에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또한 남에게만 바라지 말고 자신도 적은 액수라도 내놓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창조의 마음이다. 무자비한 소유욕 보다는 무소유욕이 휠씬 신선하고 깨끗하다. 또한 창조욕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원동력이 된다.